아버지의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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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직업상 늘 귀가 시간이 늦다.
날마다 문을 따달라고 초인종 누르기도 번거로워서 아주 열쇠하나를
따로 장만해서 드나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밤 늦은시각 열쇠를 달그락 소리만 나면 어머님은
주무시지 않고 마중을 나오신다.
그런데 오늘따라 문을 다 따고 거실로 들어설때까지
어머님이 나오시지 않는다.
설마 주무실 시간은 아닌데 하는 생각으로 가만 어머니 방을 들여다
보았더니, 어머니께서 아버지의 초상화를 꺼내놓고 물끄러미 들여다
보고 계셨다.
방을 들여다 보는 나를 보시더니
"이거 저기다 걸어라."
나는 어머니가 손수 치우신지 오랜 초상화인데 왜 다시 꺼내 걸으라고
하시는지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의 초상화는 형님이 소년기에 그림을 처음배우면서 아버지를
그린 것이다. 아버지는 내가 7곱살때 때 돌아가셨다.
그래서 나는 뚜렷하게 아버지 얼굴을 기억 못한다.
형님이 단체사진속에 들어있는 작은 사진한장으로 아버지의 초상을 그려내자
주변의 어른들이
"융기란 어쨀수 없제! 어찌게 저 째깐한 사진으로 똑 같이 기렸으까?"
두살터울의 형님이라고 아버지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할리 없으련만
초상화의 정밀도가 높았던지 칭찬이 잦았고 우린 그 초상화를 통해서
아버지의 모습을 각인하고 살아왔었다.
아버지의 초상화는 형님의 솜씨도 자랑할겸 집안에 걸어 놓았는데
어느해던가 어머님이 속상하시다며 그림을 떼어 놓으라고 하시더니
장농에 보관하신지가 벌써 삼십수년째이다.
"왜 꺼내 놓으셨어요?"
"글쎄다. 내가 죽을란갑다"
하시면서 심드렁한 표정으로 테레비만 보신다.
돌아가시다니? 난데 없는 말씀이 가슴을 쳤다.
어머니는 금년 74세시다.
골다공증으로 오른쪽 무릎이 걷기에 불편할 정도로 아프시긴 하지만
새벽기도를 하루도 거르지 않으실 정도의 건강은 유지하고 계신다.
노인이면 다 겪는 다른 노화현상도 조금씩 있으시지만
아직 걱정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당신은 아니셨던가?
많이 불편하고 아프셔도 참으셔서 우리가 모르고 있는 무엇이 있으신겐가?
왜 갑자기 아버지의 초성화를 꺼내놓고 걸어 놓으라 하실까?
"내가 죽을란갑다"하신 말씀이 자꾸 걸린다.
액자 하나를 내려놓고 대신 초상화를 걸면서
"아버지, 어머니가 갑자기 왜 그러시나요?" 하고 초상을
올려다보며 마음속으로 여쭈어본다.
耳順인 이 아들보다 훨씬 젊은 33살의 젊은 아버지는 아무 대답이 없으시다.
"어머니, 반듯하게 걸렸어요?"
어머니는 내 말을 들으시고도 대답은 커녕 보시던 테레비에서
눈길을 떼지 않으신다.
알수 없는 일이다.
오랜세월 동안 장농에 넣어두었던 초상화를 갑자기 꺼내
걸어라 하실때에는 무슨 사연이 있으실 법한데.......
더 여쭙기 곤란한 무거운 분위기에 입을 다물었다.
다음날.
궁금한 마음에 知人에게 간밤의 일을 이야기했더니
"어머님이 아버님하고 이제야 화해 하시나 봅니다." 한다.
화해라..? 그 말이 불현듯 어머니의 신산하시던 젊은 날을
떠올리게 했다. 유난히 금슬이 좋다고 동네에 소문이 자자했었는데,
어린 우리들과 유복자 동생을 남기고 훌쩍 먼저 가버린 아버지가
어머니는 무척이나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졸망졸망 우리 어린 오남매를 보리 밭고랑에 앉혀놓고 밭을 매시면서
토하시던 한숨이 휘파람 소리처럼 들리던 아련한 기억.
말귀라도 알아들을 만큼 내가 크자 가끔 던지시던
"사는것이 왜 이리 폭폭하냐?"
하는 푸념들이 순간 가슴을 서늘하게 빗겨간다.
그래도 오늘은 왜 초상화를 다시 걸으셨냐고 여쭈어 보아야하겠다고
다짐하며 현관을 들어서는데 기다렸다는 듯이 어머니가 나오시며
말씀하신다.
"사진이 울퉁불퉁 해 졌어야!"
아닌게 아니라 초상화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바탕천이 여기저기 울어있었다.
오랜 세월동안 장농 안에 있었던 초상화니 그럴 법도 하지만
무심코 바라보면 거의 발견할 수 없는 미세한 주름이다.
낮동안 어머니는 식구들이 다 나가고 난 다음 당신혼자 집을 지키면서
아버지의 초상화를 오랜 시간 자세히 들여다 보셨다는 증거이다.
어젯밤에는 벽에 걸고 보아달라고 해도 쳐다보지도 않으시던 분이
그 작은 변화를 발견하실 정도로 오래, 자세히 아버지 얼굴을 바라보셨다니,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사진곽 내려와 봐라" 하시면서 다리미를 찾으신다.
"한번 다려보자"
액자를 내려서 뒷부분을 열고 천을 뒤집어 다리미질을 했다.
아닌게 아니라 울었던 부분이 곱게 펴진다.
어머니는 손수 유리를 닦고 사진의 얼룩을 손질하시고
"됐다. 걸어봐라"하고 초상화를 건네주신다.
나는 초상화를 다시 제자리에 걸었다.
"똑 같다!"
이리저리 초상화를 바라보던 어머니가 감탄의 소리를 하신다.
40여년의 질곡을 넘어 모자가 나란히 사진을 보면서
서로 다른 애정, 서로 다른 그리움을 가슴에 삭이고 있다.
아버지에 대한 나의 애정과 그리움이
어머니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내 아버님에 대한 사랑이 어머니에 미치랴.
내 눈에 아무렇지도 않게 보이던 초상화의 작은 주름 하나도
용납되지 않는 당신의 사랑을 나는 아버님의 초상화를 통해
보고 있는 중이다. 사랑이 크면 미움도 원망도 컸으리라.
이제 어머니가 진정으로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화해하고
당신보다 먼저 떠나신 아버지를 용서해 주셨으면 하는 바램으로
어머니를 곁눈질 해 본다.
눈물자욱이라도 혹시 볼까해서다. 그러나 그것은 아니었다.
마른 바람이 어머니의 얼굴을 덮어가듯 담담한 모습이시다.
"왜 사진틀을 꺼내놓으시고 싶으셨어요?"
끝내 짖궂게 여쭈고 만다.
"이젠 느그들도 봐야 않허것냐?"
그 뿐이셨다.
당신의 가슴에 남아 있는 말은 끝내 하지 않으신다.
나는 어머니를 바라보다가 눈을 돌려 아버지의 초상화를 올려다 본다.
젊은 아버지가 늙은 아들을 미소띄고 바라보신다.
"아버지! 아직은 어머니를 제가 좀더 모실게요. 아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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