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집-호칠이

호칠이

겨울 천왕봉, 눈과 산새들 (산행기)



	산행코스 : 중산리-법계사-천왕봉-장터목-중산리 산행일자 : 2001. 2. 3. (토). 날씨 : 맑음. 지리산을 좀 다닌다고 다니면서 아직 당일로 혼자 다녀올 생각은 못해왔다. 지난 2년여 동안 꽤 여러차례 지리산중에서 1박을 하는 산행을 해 왔지만 숙박이 있는 산행이라면 계획부터 준비물까지 좀 복잡해질 수 밖에 없는 탓에 더 자주 가보고 싶은 마음은 마음뿐으로 그쳐 왔던게 사실이다. 이번에 당일치기 그것도 단독으로 지리산행을 하기에는 연유라면 연유가 좀 있다. 지난달 세석산장에서 일박하고 밤새 내린 폭설 때문에 천왕봉을 포기하고 내려왔던 아쉬움을 이겨울이 가기전에 만회 해야겠다고 별러 왔고 평소 같이 잘 다니던 사무실 직원과 계획을 세웠다가 사정상 취소 돼 버리고 날짜만 흘러가 버렸다. 사정이라는 것이 복잡하게 얽혀가는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회사일이 개입된 결과이니 자책 할 일도 누구에게 불만 할 일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집사람을 끌고 가서 반드시 지리산 구경 한번 시켜보자는 일념하에 며칠을 교육시켜 보았건만 따라올 듯 하던 사람이 이핑계 저핑계 대면서 그 역시 실현 불가능으로 기울어 버렸다. 가기 싫으면 싫은 것일 뿐 웬 이유가 그리도 많은지,,, 세월 갈수록 아이들 우선 제일주의로 인해 부부간에 웬지 옛날 같지 않은 소원함을 만회해보려는 내 뜻에 동감을 하긴 하는 눈치인데,,, 아무튼 잘 안된다. 더 나이들어 같이 다녀도 늦지 않음이 이유가 될 수도 있겠지,,, 하고 포기해야 할 것 같다. 한신계곡, 천왕봉, 대원사길을 염두에 두고 산장예약을 위해 전화를 했더니 폭설로 인해 그 코스는 모두 출입통제 하고 있단다. 혼자서 가야할 길이니 가지말라는 길은 포기함이 마땅하겠고 가도 되는 길은 어디인가를 물어보니 대답은 예상대로다. 자고와야 된다는 법칙이 있는 것도 아니고 눈도 만만치 않다고 하니 당일치기로 결정하고 홀가분하게 단독산행으로 마음 먹었다. 지난 한달여 이런저런 이유로 운동다운 운동 한번 못하고 지내왔더니 천근만근 무거운 몸상태 달래 주러라도 꼭 다녀 오고 싶은 산행이다. 요즘 정신적으로도 뭔가 기가 빠져나간 듯 질척거리고 있으니 이번에 보약대신으로 지리산 바람이나 실컷 마셔보고자,,, 한달에 한번 정도 찾아 먹는 휴무 토요일, 아침 7시에 집을 나서 차를 몰고 고속도로를 질주하여 두시간도 채 안되어 중산리 매표소에 도착했다. 여기 중산리까지는 따뜻한 남쪽나라 범주에 드는가 보다. 전례없이 꽤 많은 눈이 내렸을 텐데 여기까지 오는데 눈내린 흔적을 거의 보지 못했다. 응달진 곳에 눈내린 자국이 일부 남아 있지만 국도변 풍경들 모두 마냥 깨끗함에 때이른 봄냄새까지 느끼게 한다. 아침9시 매표소를 통과하여 산행을 시작 하였다. 날씨는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파란하늘에 어제까지 제법 춥던 기온이 아침인데도 그리 춥지 않은 날씨에 겨울산행에 아주 그만인 날씨가 되어 있었다. 칼바위를 지나 법계사까지 마음먹고 쉼없이 치고 올랐다. 칼바위를 지나면서부터 눈들이 만만치 않게 쌓여 있고 그대로 사람들 발길에 다져져 있어 아이젠을 착용 했음에도 미끄러지기 일쑤다. 가파른 고갯길에서 주르륵 미끄럼 타버려 낭패보기 여러번 했다. 로타리산장에 식수가 없어 법계사 경내에 들어가 잠시 앉아 땀을 식혔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고지에 자리잡고 있다는 법계사 경내는 한사람도 보이지 않고 햇살에 반사되는 하얀 눈빛과 처마에 매달린 굵은 고드름들만이 혼자 들어온 낯선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등산잠바를 벗으니 안에서 물흐르듯 흐르던 땀이 금방 수증기 되어 반은 날아가 버리고 반은 찬물을 뒤집어 쓴 듯 가만 앉아 있기 어려울 만큼 한기를 심하게 느낀다. 풀린 듯한 날씨가 여기서는 웬걸 차디찬 날씨가 두눈을 부라리고 남아있어 움직이지 않으면 견디기 어려울 만큼 매섭게 몸부림 치고 있다. 법계사를 지나 몇고개를 숨이 턱에 차도록 오르내리니 눈과 바위와 눈꽃핀 나무들이 환상처럼 어울어진 천왕봉 산마루가 거대한 절벽되어 숨이 막힐듯한 자태로 눈앞을 우뚝 가로 막는다. 법계사쪽에서 천왕봉을 오르는 마지막 가파름은 아는 분들 모두 아실만큼 악명 높지 않은가? 거기에 두껍게 내려 덮인 눈이 사람들 발길에 다져지고 얼어붙어 있어 TV에서나 보던 수직빙벽 등반을 방불케 했다. 정상에서 드리워진 로프 한가닥을 손에 쥐고 몸을 의지하고 변변치 않은 아마츄어용 아이젠 하나믿고 한발한발,,, 손에 잡힐 듯 빤히 올려다 보이는 눈덮힌 하얀 정상과 파란하늘의 경계선이 왜그리도 멀어 보이던지,,, 수직빙벽 등반의 어려움과 묘미를 일부나마 맛 보았다고 할까,,, 아무튼 이번 산행의 최대 어려움은 정상에 서기까지의 마지막 삼백미터 가파른 오르막이다. 중간쯤 올라가 밧줄을 잡은 손에 힘이 빠져 놓아버리면그대로 백여미터 아래로 미끄러져 떨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 그래서 처음부터 다시 올라야 하는 상황,, 아무튼 천왕봉을 이번처럼 어렵게 올라본 기억이 잘 없다. 12시 좀 지나서 정상에 올랐다. 바람이 매섭게 부는 정상에는 눈밭에 사람들 발자국들만 깊게 파여져 있다. 발길 닿지 않은 눈밭에 발을 디디면 허벅지까지 푹 잠겨져 버린다. 한숨 돌리고 사방을 둘러보니 새하얀 설국의 천지가 모두 발아래 펼쳐진다. 천왕봉만이 갖고 있는 매력을 음미하고자 눈앞에 잡히는 사방의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세아려 보았다. 사방에 내리 뻗은 깊고 기나긴 계곡들,, 그아래 아득히 멀리 점점이 이어지는 사람사는 마을들,,, 멀리 여자 엉덩이 같이 생긴 반야봉도 예전 모습 그대로다. 오늘은 흰색 팬티로 갈아 입고 흰색 침대위에 엎드린 자태가 요염하게도 보인다. 그옆에 노고단을 시작으로하여 지리산 주능선을 따라 내마음 잠시 한 마리 새가되어 날아 다니다 천왕봉 비석위에 내려 앉았다. 정상비석 주위에 웬 산새들이 꽤 여러마리 노닐고 있다. 뭔가 열심히들 먹거리들을 쪼고 있는 모습이다. 가까이 다가가면 날아가 버릴 것 같아 무심한 마음으로 그냥 쳐다 보고 있으려니 이놈들이 내발아래까지 먼저 다가와 도망갈 줄을 모른다. 꼭 참새같이 생긴놈들이 십여마리는 되겠다. 원앙새 깃털모양으로 알록달록 색깔의 비둘기 만한 크기의 놈들도 몇마리 섞여 있다. 먹던 귤껍데기 잘게 잘라 던져주니 우르르 달려들어 쪼아댄다. 도대체 사람을 겁내하지 않는 모습이 신기하단 생각도 잠시뿐 전례없이 많이 내린 눈 때문에 산새들도 먹거리 찾아 헤매다 이높은 산정상까지 사람 무서운 줄 까맣게 잊고 찾아드는 모양이다. 머리좋은 녀석들,,, 그래 여기오면 항상 먹을 것 얻을수 있단다. 천왕봉이야 사시사철 등산객들로 북적이니 사람들이 먹다 남은 음식잔재 만으로도 너희들 먹거리는 충분 할테니,,, 정상에 서너사람 보이더니 내려가 버리고 천왕봉 눈덮힌 바위 정상에 나혼자 남겨졌다. 나 혼자 이지만 저녀석들과 함께 있으니 외롭지 않고 있을만 하다. 차가운 바람에 오래 머물지는 못할 곳이지만 저녀석들과 놀아주는 그맛에 금방 내려갈 마음도 생기지 않는다. 내가 먹으려던 쵸코렛 반밖에 먹지 못했다. 반은 저녀석들 몫으로 나눠주고 내발등에 까지 올라 타려는 산새들과 한참 시간을 보냈다. 이런 생각이 불현 듯 들었다. 굶주린 인간의 얼굴은 분명 못먹은 표시가 나기 마련인데 저놈들은 굶주렸어도 표시가 나질 않는다. 기아에 허덕이는 난민들의 표정,, 그런 표정 말이다. 저놈들은 표정이야 있을 수 없고 대신 무서워 해야할 사람들도 몰라보고 겁을 잊어버리는 태도로 나타나는 모양이다. 귀여운 산새들의 모습에서 생각이 바뀌어 가엾은 놈들,,, 이란 측은한 생각에 과자부스러기 던져주며 시간 가는줄 모르고 앉아 있었다. 한겨울 산짐승들은 먹거리 찾아 산아래 민가로 내려와 피해를 준다는데 날개달린 산새들은 거꾸로 사람들 많이 머무는 산정상으로,,,, 산에 다니면서 산새들을 발아래에 두고 놀아보기도 처음이다. 눈보러 다닌다는 겨울산행이 겨울산새 보러 간다고도 해야 하겠다. 장터목까지의 내리막도 쌓인 눈 때문에 수월치가 않았다. 가파른 눈길에 미끄러지지 않으려 애쓰며 내려가니 내리막 걸음에도 힘이 두배로 든다. 제석봉 고사목들도 이젠 똑바로 서있는 놈들 몇그루 보이지 않는다. 서있는 놈보다는 힘이 다하여 쓰러져서 땅과 영원한 약속을 나누고 있는 듯 편한 자세로 쉬고 있는 놈들이 더 많아 보인다. 남아있는 저놈들도 머지않아 쓰러지고 나면 고사목이 생긴 아픈 사연들도 함께 땅속에 묻혀 버리려나,,, 새롭게 자라는 수목들도 별로 보이지 않으니 제석봉은 아픈사연만 간직한채 여름엔 갈대 초원으로, 겨울엔 흰 눈밭으로 뒤덮여 황량하기만한 모습으로 남을 것 같아 아쉽다. 오후 1시반 장터목산장에서 라면 한 개 끓여서 싸온 도시락과 함께 점심을 해결 하였다. 남은 라면 국물에 김치와 참치캔 하나와 찬밥을 함께 넣어 그냥 끓여 후후 불며 들이키듯 먹으니 세상만사 부러울 것 없어진다. 얼큰한 국물과 함께 가장 간단히 효율성 있게 즐길수 있는 수단으로 터득한 산속에서의 일등메뉴가 아닐수 없다. 2시가 훨씬 지나서 중산리쪽으로 하산을 시작 했다. 하산 초입길은 한참동안이나 아까의 오르막길 못지않은 가파르기 그지 없고 쌓인 깊이 조차 알수 없는 눈구덩이 눈길이다. 주저앉아 기다시피 내려오는 발걸음 하나하나 불편하고 힘들기 짝이 없다. 착용한 아이젠도 별 역할을 못하고 미끄러져 엉덩방아 찧기 일쑤다. 도무지 안되겠다는 생각에 입고온 면바지 하나 버릴셈 치고 스며드는 얼음장같이 차가운 눈 녹은물 감수하고 그대로 주저앉아 엉덩이 썰매를 타기 시작했다. 놀이공원에서 눈썰매 타는 그 자세로 주저 앉으니 가파른 눈구덩이에서 굉장히 빠른 속력이 되어 내려 꽂듯이 미끄럼을 타 버린다. 미끄럼 타 버리니 어려워 보이는 가파른 눈길이 갑자기 수월해 졌다. 한번에 수십미터씩 몇번을 타고나니 수월해진 것은 좋은데 이번에는 엉덩이가 날아가 버릴 듯 얼얼하게 아파오는 통증에 견디기 어려워 진다. 바지 엉덩이에 범벅이된 눈은 체온으로 녹으면서 얼음장물이 되어 피부속 깊이 스며드니 이또한 고통이다. 계속 더 엉덩이 썰매 타기도 포기 해야만 했다. 두시간 넘어 내려오는 하산길이 만만치가 않았다. 칼바위 가까이 내려오고 나서야 길은 훨씬 수월해 졌고 눈으로 덮힌 지나온 천왕봉의 모습과 아무 손길도 닿지 않은 계곡바위에 얹힌 두꺼운 흰눈들의 소담스런 모습들을 감상할 여유가 비로소 생긴다. 두껍게 얼어붙은 폭포수 얼음들이 반쯤 녹아내려 맑디맑은 청류를 졸졸 흘러 내리고 있다. 그러고 보니 내일이 벌써 입춘인데 깊은 계곡 얼음사이 흐르는 물에 봄냄새가 배어 있는 듯 하여 반갑다. 바지 엉덩이에 차갑게 스며들던 물도 시간이 지나 이젠 증발해 버린 듯 한결 여유로움에 가던 길 멈추고 계곡 바위위에 앉아 한참을 쉬어 갔다. 반쯤 녹은 얼음사이로 흐르는 계곡물에 손 담그고 물 한모금 받아 마시니 긴장이 눈녹듯 풀리며 무사히 하산했다는 안도감이 밀려온다. 칼바위를 지나 한참을 더 걸어 매표소에 이르니 오후 4시반이다. 그동안 내린 폭설로 인해 사실 혼자만의 지리산행이 조금 걱정은 됐다. 천왕봉을 지나오는 산행길에 만난 사람들도 헤아릴 정도로 드물었던 걸 보면 최근 내린 폭설이 등산객들에게 부담이 되긴 된 모양이다. 중산리 주차장 주변 음식점들도 인적 별로 없이 한산한 모습이다. 오늘 날씨가 아주 큰 도움이 됐다. 파란하늘 밝은 햇살아래 눈부시게 반사되어 빛나는 지리산의 설경을 만끽하기에 원없이 충분했다. 7시간 남짓의 산행길이 몸에 큰 부담없이 기분좋은 하루를 일궈냈다. 진주를 거쳐 창원까지 돌아오는 국도와 고속도로도 오늘 하루 날아갈 듯한 기분 만큼이나 막힘없이 뚫려 있다. 일요일 오후면 항상 그렇게나 밀려 터지던 길인데,,, 그러고 보니 오늘은 토요일,,, 휴무 토요일에 당일 산행을 하는 것도 하나의 지혜가 되겠다. 시원하게 내달려 집에 다다르니 오후 7시가 넘었을 뿐이다. 몸과 마음이 날아갈 듯이 가벼워 짐을 느낌과 함께 시작부터 끝까지 예상했던 시간 계획대로 어긋남 없이 마무리 하였기에 산뜻한 산행으로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2001. 2. 4. 김 두 호 씀. ** 산행요약 중산리-법계사-천왕봉-장터목-중산리 (약 13Km) 2001. 2. 3 (토) 날씨: 맑음 07:00 창원출발, 자가운전 단독. 09:00 중산리 매표소 출발 10:30 법계사, 휴식 11:20 개선문 12:10 천왕봉, 휴식 13:30 장터목 산장. 라면과 도시락으로 점심. 14:20 장터목 출발. 16:30 중산리 매표소 도착. 19:00 창원집 도착.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