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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 마을
권혁웅
처음 나는 창신동에 살았다 방과 방 사이가 길이었는데, 그
길은 산정까지 이어져 있었다 골목에 리어카가 들어오지 못
해서 식구들은 묵묵히 땀을 흘리며 세간을 날랐다 장롱 곁에
할머니, 할머니 곁에 어머니, 어머니 곁에 아버지, 아버지 곁
에 누나들, 누나들 곁에 형, 형 곁에 나, 내 곁에 옷장......
지루한 순열이었다 장독대에 오르면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
였다 물론 거기선 내가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삼선동 역시 그랬다 산세(山勢)를 따라 길을 낸 곳이었다 자
연과 인위가 한데 어울렸다 시멘트로 지은 골목길 계단은 넓
이와 높이와 굴곡이 각각이었다 밤마다 발길을 채가는 허공을
피해야 했다 발끝에 마음을 걸어, 두근두근 다녔다 자주 고양
이가 죽고 집비둘기가 사라졌다 언젠가는 축대가 무너진 적도
있다 집 앞에 몇 번인가 조등이 걸렸다 삼선동은 세 선녀(仙
女)가 내려온 곳이다 당연히, 승천하기에도 좋은 곳이었다
그 다음에는 장위동에선 3년, 방학동에서 3년을 살았다 장
위동의 이편은 양지고 저편은 음지다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좁은 안마당까지 햇빛을 받으려 애를 썼다 수건과 속옷
이 옥상에 걸렸다 버스가 커브를 틀기 위해 가게 앞에 내놓은
평상을 부수기도 했다 수건과 속옷이, 사과와 수박이 한데 뒹
굴었다 방학동은 산자락이 마을을 끌어안은 곳이다 내가 방학
에 살았노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멍청하게 묻고 했다 늘 방학
이니 좋겠어요? 가끔 등산복 차림에 약수통을 든 사람들을 만나
곤 했지만 나는 한 번도 인사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등산이 내겐
하산이었으니까......나는 속세에 나가, 도(道)닦기 싫었다
지금 나는 쌍문동에 산다 쌍문의 마을 역시 산을 닮았다 아
니, 집들 모아 태산이라고 해야 한다 이곳은 아파트 천지다
내 집 위엔 다섯 채의 집이 있고 아래엔 아홉 채의 집이 있다
집에 가기 위해서는 수직의 골목을 통과해야 한다 모든 집이
도량이다 계단은 108개가 넘는다 이곳의 도(道) 역시 산정까
지 이어져 있다 사람들은 고르게 심은 나무들 같다 같은 자세
로, 나란히 눕고 나란히 일어난다 사람이 모여 산을 이룬다는
것을, 성속(聖俗)이 하나임을 여기서도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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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04  살아라, 그리고 기억하라 - 나희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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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02 9인제 배구 - 이문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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