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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조롱박
비닐봉다리에 묶여진 조롱박을 버린다
벽장문을 열 때마다 부시럭거리며 사람신경을 거슬리게 하고
애써 죽여버린 기억들까지 살려내어 성가시게 하던 그것이
몇년 동안 거기에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고 싶어
낡고 찌든 회색의 봉다리 속에는
돌아가실 무렵의 아버지처럼 바짝 마른 조롱박 하나와
따뜻한 품이 그리웠던 나처럼
잔뜩 웅크린 작은 조롱박하나가 들어있다
자글자글 주름진 조롱박 속에는
검정고무신을 신고 책보를 메고 황톳길을 걷던 아버지
포플린 와이셔츠를 입고 풍금을 타던 아버지
자전거 뒤에 나를 태우고 신작로 길을 쌔앵 달리던 아버지
밤마다 잠든 나를 일으켜 깨엿을 먹이시던 아버지
손녀딸을 업고 달성공원에서 환희 웃으시던 아버지가 들어있다
그 가을 휴양림의 작은 오두막으로 찾아 간 내게
아버지는 박을 타서 속을 파내고
부모자식 이승 인연의 줄인 양
조롱박에 구멍을 뚫어 무명실을 매어주셨다
허궁소 다리아래에서 느그 아부지를 만나면
눈에서 호랑이 같은 파란불이 줄줄 흘러
오금을 저리게 했다던 아부지
아부지 고함소리에
인근마실 산천초목이 벌벌 떨었다던 아버지는
고향마을이 건너다보이는
아주 가끔 길 잃은 나그네들만이 지나는 산자락 그곳에
앙상한 몸을 누이고 계신다
어쩌다 꿈 속에서 웃으시는 아버지
슬픈 듯 지켜보기만 할 뿐 말이 없는 아버지
장성한 자식 다섯을
약병처럼 주렁주렁 달고 사셨던 아버지
십년 넘게 팽개쳐 두었던 봉다리를 열고
메마르고 단단히 여물어 있는 나를 꺼낸다
그날밤 나는 아버지의 등에 업힌 나를 벽에 걸었다
* 허궁소 : 고향 마을 절벽밑 웅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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