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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모습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아파트 단지 정문을 지나 백여 미터쯤 들어가면 길이 두 갈래로 나뉘지는 지점에 서있는 전화박스 곁에서 우리는 만나게 되어있었다.
내가 너무 일찍 온 걸까.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세 시 오 분전. 나는 조금 초조해 하고 있었다. 집을 나와서 버스를 타고 와 그 자리에 서게 될 때까지 초조함은 줄곧 집요하게 목덜미를 잡아당기고 있었던 것이다.
조금이라도 초조함을 잊어보고자 심호흡을 해보았다. 차가운 공기 가 폐부 깊숙이 들어와 나의 체온에 더워져 다시 뱉어 나왔다. 긴장은 좀 체로 풀리지 않았다. 방금 확인한 시계가 다시 보고 싶어지는 것이 어쩔 수가 없었다. 또 다시 시계를 본 나는 식탁 위에 놓인 치즈를 먹으러 가는 쥐새끼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너의 모습을 찾아보고 싶었지만 너는 아직 까지도 내 눈 앞에 보이지 않았다. 나는 조금 혼란스러워 하고 있었다. 그래 이건 분명 주위가 시끄러워서 일거야... 아파트 단지라 그런지 수다를 떨며 걸어 다니는 아주머니도 보였고 아파트 앞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아니 어쩌면 이건 일상생활에서 들려오는 지극히 평범한 소리들일 지도 몰랐다. 아마도 시끄럽게 들리는 건 내 마음이 혼란스럽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너무나도 긴장을 하고 있었다. 약속시간은 아직 남았는데도 네가 오고 있는지 계속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곤 했다. 내 귀는 길가에 걸어 다니는 개미 발자국 소리까지도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심장이 뛰었다.
진정하자. 나는 늦지 않아다. 제 시간에 맞춰 약속시간에 나온 것이다. 이번 약속은 ‘지켜질’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문득 너와의 약속이 내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번만은 지키지 않으면 안 될 이 약속이 말이다.
그 날은 다른 날과 아무것도 다를 것이 없는 화창한 어느 오후였다. 그 날도 나는 평소와 다를 것없이 집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너는 조금 흥분한 듯 한 얼굴로 내 앞에 나타났다. 그 사실에 조금 놀라긴 했지만 더 의문스러운 것은 너의 태도였다. 크게 기색한 것은 아니었지만 화가 난 듯 한 모습이 역력하다는 걸 나는 알아차릴 수 가 있었다. 아마도 가족들 앞이라 크게 기색하지 않는 것 같았다.
우리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어느 한적한 카페를 찾았다. 평소 같았으면 같이 술이라도 마시러 주점엘 갔었겠지만 지금은 왠지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이런 분위기를 만드는 너의 그런 태도에 조금은 화가 났었지만 곧 내가 그렇게 화낼 상황이 아니란 걸 알게 되었다. 상황은 이러했다. 네가 아주 중요한 약속을 나와 했었는데 내가 그 약속을 잊어버리고 지키지 않았던 것이었다. 이번 한번이라면 너도 쉽사리 용서해 주었었겠지만 이런 일이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미안한 마음에 너에게 몇 번이나 사과를 했지만 너는 쉽게 화를 풀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무슨 약속을 했었지?”
긁어 부스럼 이란 게 이럴 때 쓰는 말 인걸까.
“뭐야? 그것도 잊고 있었단 말야? 니 자식이 그러고도 친구냐? 됐어 너하고 이젠 절교야!!”
너는 그 말을 끝으로 카페를 나가 버렸다. 네가 너무나도 화가나 있었기 때문에 나는 붙잡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순간 너무 놀란 나는 충격을 받고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목석처럼 앉아있었다.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소리가 내 귓가를 때리지 못했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나는 가장 친한 친구 한명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너무나도 미안한 마음에 또 지독한 자기혐오로 한동안 그 자리에 앉아 멍청한 내 자신을 손가락질 해대었다.
그 일이 있은 지 며칠 후였다. 낙심해 있던 나는 그 며칠 동안 일 조차 손에 잡히지 않고 있었다. 그 만큼 너는 내게 있어 소중한 친구였다. 그렇게 한숨을 쉬고 있는 내게 전화 한통이 왔다. 너였다. 화가 나서 완전히 인연을 끊어 버릴 것 같았던 너에게서 전화가 온 것 이었다! 당황한 마음에 미안하단 말만 연발하는 나에게 됐다는 듯이 답했다.
“알았어! 알았어! 됐으니까. 이제 내말 좀 들어봐”
너는 내게 한 번 더 기회를 준다고 말했다. 이번 약속만은 펑크를 내면 안 돼는 일이며, 만약이라도 약속이 펑크가 난다면 자신은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될 것이고, 고로 나하고도 이젠 완전히 끝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무조건 알겠다고 답했다. 그러나 그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약속 날까지 다하기엔 조금 버거운 작업량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해야 했다. 작업은 밤을 새워 이루어 졌다. 결국 모든 작업을 완성시키고 내가 이 자리에 서있는 것이었다. 여기까지 생각에 미치자 이제는 안심이라는 생각에 긴장이 확 풀려버렸다.
그때였다. 내가 막 손목시계를 다시 확인 하려는 찰나 손목시계에서 알람이 울리는 것이었다.
“따르르르르릉~~!!!”
엄청난 소리에 난 잠에서 깨어났다. 꿈에서의 긴장이 아직도 남아있는지 퍼뜩 정신이 차려졌다. 나는 자명종 시계를 바라보았다. 약속 시간 두 시간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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