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어렵다 - 하나
청산도
박두진
산아, 우뚝 솟은 푸른 산아. 철철철 흐르듯 짙푸른
산아. 숱한 나무들, 무성히 무성히 우거진 산마루에 금빛 기름진 햇살은 내려오고,
둥둥 산을 넘어, 흰구름 건넌 자리 씻기는 하늘, 사슴도 안 오고, 바람도 안 불고,
너멋 골 골짜기서 울어 오는 뻐꾸기…….
산아, 푸른 산아. 네 가슴 향기로운 풀밭에
엎드리면, 나는 가슴이 울어라. 흐르는 골짜기 스며드는 물소리에 내사 줄줄줄 가슴이
울어라. 아득히 가버린 것 잊어버린 하늘과, 아른아른 오지 않는 보고 싶은 하늘에,
어쩌면 만나도질 볼이 고운 사람이, 난 혼자 그리워라. 가슴으로 그리워라.
티끌 부는 세상에도, 벌레 같은 세상에도,
눈 맑은 가슴 맑은 보고지운 나의 사람. 달밤이나 새벽녘, 홀로 서서 눈물 어린 볼이
고운 나의 사람. 달 가고, 밤 가고, 눈물도 가고, 틔어 올 밝은 하늘 빛난 아침 이르면,
향기로운 이슬밭 푸른 언덕을, 총총총 달려도 와 줄 볼이 고운 나의 사람.
푸른 산 한나절 구름은 가고, 골 넘어 뻐꾸기는
우는데, 눈에 어려 흘러가는 물결 같은 사람 속, 아우성 쳐 흘러가는 물결 같은 사람
속에, 난 그리노라. 너만 그리노라. 혼자서 철도 없이 난 너만 그리노라
우리나라 사람들이 사랑에 참 인색한 건지 아니면 시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며 쓴 시를 아니다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참 궁금할 따름이다.
시인, 그저 저기 한 사람이 내가 보기에 아름답기 그지없고 사랑스러워서 하얀
종이 위에 느낀대로 그의 마음을 노래했을 뿐인데 그것이 어느새 민족의 아픔을 상징하고
화합을 기대하는 웅장한 스펙타클이 되어 버렸다.
박두진의 청산도를 보자마자 나는 시인에게 감탄하면서 나도 이런 사랑을 하자라고
다짐했었다. 하지만 수업시간에 턱 괴고 앉아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있노라면 박두진이
노래한 것은 사랑이 아니지 않는가.
저기서 보면 짙푸르게 우뚝 솟은 산은 사슴도 안 오고 바람도 안 불고 뻐꾸기만
청승 맞게 울어와서 외롭기 그지 없다고 한다. 내가 마냥 그리워하는 볼이 고운 사람이
오지 않아서 외롭다고 한다. 눈 맑은 가슴 맑은 보고 지운 나의 사람, 볼이 고운
나의 사람을 시도 때도 없이 기다리면서 사랑을 갈구하는데 나는 아무리 읽어봐도
민족의 화합이고 갈등이고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이며 무엇이며는 모르겠다.
해석을 가만히 듣고 앉아 있자면 , 같다 붙이기는 어떻게 같다 붙여 말이 되는
것도 같은데 가슴으로는 못 느끼겠으니 이를 어쩌면 좋으랴.
박두진의 아름다운 사랑에 대한 내 기대는 이렇게 무너졌다. 언젠가 시간이 지나서
내가 만약 아름다운 시를 쓸 수 있는 아름다운 사람이 되면 사람들은 내 시를 어떻게
읽을까. 사람들은 그저 고개를 끄떡이고 가슴으로 음미하며 이 사랑은 아름다운 사랑인가
보다 할지 모른다. 그런데 몇몇 현학적인 사람들의 손을 거치면서 내 시는 엉뚱하게
정화되어 분단 현실을 가슴 아파하고 민족의 대 화합을 노래하는 그런 시가 되어버릴지도
모르겠다.
나도 분단 현실이 가슴 아프고 우리가 하나라는 사실은 알지만 그것을 시로 표현하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누군가 사랑을 해 본 사람은 알겠지마는, 다른 이를 사랑할 때
가장 빛나는 시가 탄생할 것은 자명하다.
많은 시는 자신의 내면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나의 세계, 나의
자아에 대한 기쁨과 부끄러움과 성찰에 관한 시가 참으로 다른 이들의 고개를 숙이게
만들고, 나의 사랑, 내가 사랑하는 사람, 그 아름다운 사람에 관한 시가 다른 이들의
심금을 울리는 것이리라.
사람들은 그 시를 쓴 이를 보지 않는다. 그리고는 그 사람에게 참 무거운 짐을
건넨다. 시인은 황사 날리는 세상 속에 서서 그 세상을 대표하는 투사가 되고 만다.
시라는 예술에 참여의식이 전혀 없다는 것이 마냥 좋은 일이 아님을 알기는 하지만
우리는 너무 강력하게 시인을 향해서 너 또는 나와 같은 섬세한 인간이 아니라 공동체를
향한 의식을 외쳐달라고 주문한다. 왜 그렇느냐 하고 반문하면 ‘ 시대적 상황 ’
이라는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리도 아름다고 애절할까 - 해서 가슴을 두근두근하게 만들었던 그런
시들이 ‘ 민족, 민족, 민족 ’ 이라는 이름으로 해석되는 것을 보면 우리 사회는
참으로 민족에 얽히고 얽혀 있는 듯하다. 무엇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었는지, 그것은
아마도 무언의 압력일 것이다. 과연 사회가, 공동체가 개인의 감정을 지배하고 있는
것인지 , 그렇게 개인으로 하여금 공동체를 노래해야만 한다고 등을 떠다미는 것인지
모르겠다.
시는 우선적으로 가슴으로 느끼고 느끼고 또 느끼고 그러다가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렇게 자꾸만 느끼다 보면 그것이 정말로 사랑을 노래하는
것인지 민족을 노래하는 것인지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아무나 다 알 수 있을 것이다.
시는 보고 또 보면 언젠가 안다. 밑줄치고 이것은 뭘 뜻하는지 일일이 적지 않아도
될 것이다.
공동체를 노래한 시도 많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바치는 헌시까지 일부터 공동체를
위해서 어처구니없게 화생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가만히 보고 또 가만히 읽고 읽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를 못하니 이건 아름다운
사랑이 아닐까 하고 짐작하기도 전에 이미 ‘ 주제 : 어쩌구 저쩌구 ‘ 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주제가 희생당한 개인의 숭고한 감정인지도 모르고 책장을 넘기고
또 시를 배운다고들 한다. 시를 공부하자고 한다면, 시간을 많이 갖고 그저 읽고
또 읽었으면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