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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농일기 15
눈만 뜨면 마당에 풀 메는 일이 하루 일처럼 다가온다.
아침 햇살이 느티나무 위로 올라오기까지 한두 시간이 전부인데 시원찮은 농부 어실렁 거리며 준비하고 연장 챙기는데 반시간은 보내고 나면 겨우 한시간 남짓 마당에 주저앉아 풀을 뽑는다.
잔디에 끼어 사는 바랭이는 참으로 신출귀물이다. 방금 안보였는데 다시 보면 그 자리에 보이는 것이다. 바랭이란 풀은 잎도 가지 뻗음도 마치 잔디와 흡사하다. 허니 잔디인지 바랭이인지 초보는 구별하기도 쉽지가 않다. 뿌리는 잔디사이에 끼여 자라니 뽑기도 기술이 없으면 힘만 들고 잔디를 뽑기가 십상이다. 요령이 생기면 바랭이 원 뿌리를 찾아 날이 길쭉한 호미로 뿌리 근처를 몇 번 쪼아 바랭이 풀줄기를 잡고 댕기면 사방으로 뻗은 바랭이 줄기가 줄줄이 한 줄로 엮여서 올라오는 것이 속이 다 시원하다. 바랭이만 자라면 또 쉽지. 잔디를 줄지어 심어 골 사이에는 아직 빈땅인데 여기도 풀들이 떼를 지어 돋아난다. 잎이 넓고 뿌리가 짧은 잡초는 호미 등으로 밀어주면 싹이 어린 채로 잘려 제거가 되나 한두 주일 넘기면 그만 웃자라서 호미로 땅을 파서 뿌리까지 파내어야 하는 수고로움이 있다. 내가 잡초도감을 다 익히지 못해서 아는 잡초라고는 바랭이와 동방삭이 몇몇이지만 잡초들도 태어나는 계절이 있다. 일전에는 개망초가 그렇게도 지천으로 돋아나더니 그 다음에는 달개비(닭의장풀)가 돋아나고 지금은 정말이지 이름도 모르는 싹들이 흩어진 깨알처럼 돋아나고 있다.
오늘 아침밥도 저녁에 남은 밥을 물에 말아서 밥알 한 톨마저 달달 밥솥을 긁어서 밥물이며 남김없이 마셨다. 밥이 남아서 버리는 날도 있고 생각 없이 쌀을 담아서 밥을 하는 날은 어김없이 밥이 남아 버렸는데, 밥이 모자라는 날은 그런 날의 기억이 떠오르면서 부족하게 사는 지혜를 터득하고 반성하게 한다. 좀 모자라는 밥이지만 간식으로 간단히 요기를 하리라 하며 된장국이며 남은 반찬들로 대신 깨끗이 비웠다.
며칠동안 밥과 된장국으로 연명을 하다보니 오늘은 고기생각이 나서 어제 사다 놓은 돼지고기를 내놓고 풋고추와 깻잎을 따서 씻어놓고 찻물을 올렸다. 햇살이 여간 아니니 오늘도 무더위는 기승을 부릴 참이다.
처마 밑에 앉아 혼자 삼겹살을 구워서 술술 마신 술에 그만 취하고 말았다.
취하니 알 수 없는 쓸쓸함이 밀려와서는 전화통을 당겨서 화풀이를 한다. 상대는 회사에서 더운데 땀 흘리고 있는 박처사이다. 내가 맘놓고 욕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박처사 밖에 없다. 만만한 아우들이야 많고 많지만 어디 체면에 쌍소리 신소리 막소리 할 수 있는 사람은 친구밖에는 없다.
"어이 박처사, 니 내 친구 맞어?"
"야, 두칠이가 웬일이야? 어디야?"
"님씨바, 니 내 친구 맞나? 니가 내 친구라면 내가 혼자서 산막에서 산다는 걸 빤히 알면서 오늘이 며칠이나 되었는데 전화 한 통 안 넣어주나?"
"미안하다. 내가 요 며칠 좀 바빴다. 내 퇴근하고 가께!"
"이 씹새야! 퇴근하고 오긴.. 전화 한 통 해 주었으면 내가 이렇게 혼자 낮술에 취해서 헤롱 헤롱 하지는 않았을 것 아이가."
"야, 야, 알았다. 하여간 내 출발하면 전화할게."
창원서 산청 산막까지 오자면 한시간 반은 족히 걸릴 것인데 다섯 시에 퇴근하고 언제 왔다 간다는 말인가.
그런데 그 박처사가 왔다. 정말로 퇴근하고 핑비 총알같이 핑잉 날아서 산막에 왔다.
취한 김에 한숨 콕하고 일어나니 점심도 굶고 말았다.
차에서 내려놓은 선물이 바로 비둘기 집처럼 생긴 빨간 우체통이었다.
"내가 널 잊자뿐기 아이고 이 우체통 만든다고 끙끙거렸는데 산중에 사는 처사가 욕만 배우나? 산에 사는 새와 나무가 욕만 하고 사던가?"
삼각형 지붕에 작은 여닫이문에는 문고리까지 달린 정말로 예쁜 우체통이었다.
나는 지난번 물에 떠내려온 통나무 기둥을 찾아내서 우체통 다리로 세우고 마당입구에다 세워놓고는 기념사진을 찍었다.
헌데 편지가 오긴 올라나? 아직 한번도 우체부 아저씨를 본적이 없다. 여기서는.
박처사는 손재주가 여간 아니다. 그의 손만 지나가면 일이 척척 만들어지는 마이더스의 황금 손을 가졌다.
당분간 내 산막의 우체통도 나처럼 기다리는 속이 텅 빈 우체통이 될 것이다.
허나 나는 우체통을 위로 삼아 덜 외로울 것이다.
내 친구 박처사의 정성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당분간은 따뜻 하리다.
안도현 시인의 바닷가 우체국이란 시가 생각이 나서 나도.
산막 우체통
한사람도 오지 않는 산골 산막에
우체통이 세워졌다
아무도 오지 않는 산막에
약속하지 않는 손님이 찾아오길 기대하듯이
산막 우체통은
오지 않는 편지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기다리다 조금씩
마음을 비워가고
우체통의 빈 가슴에도 삶의 흔적으로
세월이 쌓이리다
오늘도 산막 우체통은
저 홀로 온 몸이
붉게 익어 간다
누구나 외로운 것
그러나
기다리는 마음은
외롭지 않다
우체통처럼 쌓였다 비워지면
알게 되리다
사천의 두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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