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산농일기 12
"산청 두칠이 산막에 와서 내 얼어죽겠다. 보일러 불 좀 넣자!"
간밤에 자기 전에 내가 모포 한 장씩 나누어주면서, 방바닥이 차가우니 보일러 틀까하고 물어도 그냥 시원하게 자겠다더니 새벽녘에 추워서 잠을 잘 수가 없노라고 보일러 스위치를 넣고 삐꺽거리는 문을 열고 나가는 꼴을 보니 덩치 작은 박처사이다. 웬만하면 쉰 소리 안 하는 사람인데 아랫도리 동태 되기 직전까지 왔나보다.
건너 산머리에서 산등으로 산 안개가 스멀스멀 내리는 것이 오늘은 비가 그쳐 줄 모양이다.
안봉천 냇물이 허연 이빨을 들어내고 하천 제방을 채워서 흘러내리는 모양을 보고는 박처사를 데리고 장맛비에 불은 물 구경을 나섰다. 언제 일어났는지 호칠이도 반바지 차림에 따라 나선다. 차를 타고 건너면 신발에 물 넣을 일이 없는데 걸어가자니 신발에 물을 넣어야 건널 수 있는 작은 개울이 산막 입구에 있다. 호칠이가 슬리퍼 차림이니 박처사를 업고 가뿐히 건넌다.
여기 저기서 냇물이 흘러 안봉천으로 흘러들어 물 구경이 여간 아니다. 냇물에 간단히 얼굴을 씻고는 코스모스 심은 둑길을 걸어서 산막으로 되돌아왔다.
이 작은 마을에 새벽부터 논에 나온 농민은 없었다. 하루종일 있어도 마을 촌로 한두 분이 나타날까 말까 하는 곳이니 오늘은 이 마을 사람들의 호기심이 동하지 싶다.
감나무 밭을 돌아보았다. 감이 거의 다 빠져버렸다. 빠져야 알이 굵어지긴 해도 90프로가 빠진 것 같았다. 내가 필요한 양은 남은 10프로면 되긴 한데 남은 것도 안 빠진다는 보장이 없다. 감나무에 농약을 뿌려야 하는데 호칠이가 해 준다고 하니 시간이 날라나?
감나무 몇 그루 잘라버린 자리에다 심은 호박줄기가 사방으로 무성하게 번지고 있다. 호칠이 눈이 뻔쩍이면서 호박잎사귀 쌈을 해 먹는다면서 잎을 딴다. 내가 몇 장을 더 따서 보내었다.
개울가에 산 복숭아나무는 복숭아가 빨그레 물이 들어가고 있었다.
"박처사, 내려가서 몇 개 따서 맛이라도 봐! 단맛은 들었지 싶은데."
"잡초가 무성해서 언덕을 내려서기가 간단하지 않네."
"아침 식사 준비도 해야 하니 산막으로 들어가세."
밥솥에서 김이 오를 즈음에 가지와 호박잎을 건걸개에 담아 밥솥에 집어넣고는 쪄내었다. 아침 밥상이 간단하지 않았다. 된장국에 김치와 가지나물, 호박잎쌈, 풋고추에 상추까지 그야말로 시골밥상이 되었다.
밥을 퍼내고 밥솥에다 물을 부어 숭늉을 끓여낸다. 남자끼리 모여도 척척 잘도 차려낸다. 가만히 보아하니 남자들이 솜씨가 모자라서 부엌일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남자가 하게되면 여자 할 일이 없어 안 하는 것인가 싶기도 하다. 반찬 한가지씩 만들어 보는 것이 재미도 있고 맛도 날 것 같아 가지무침은 선 선배를 시켰더니 간장, 고춧가루, 참기름에 깨소금 쳐서 잘도 버무려 낸다. 생원처럼 생김 사람에게도 기회도 주니 어머니 치맛자락 붙잡을 시절에 등에 업혀 넘어다 본 기억으로 잘도 해 내었다.
밥상은 내가 차렸으니 설거지는 졸병인 호칠이와 장화 두 아우 몫이 되었다. 사람 사는 집단에는 어디를 가나 다 서열이 정해지나 보다. 선배가 할 일 후배가 할 일, 어른이 할 일 아이가 할 일, 남자가 할 일 여자가 할 일, 아버지가 할 일 어머니가 할 일, 할 일을 나누어 하게 되는 모양이다.
찻물을 받아놓고 우르르 평상에 나 앉았다. 제법 햇살이 찡하게 나왔다. 장화 아우가 오늘 일을 분배하기 시작한다.
"오전에 간단한 산행을 하는데 산행코스는 두칠이 성님이 정하시고, 다녀와서 점심을 먹고는 감나무 농약을 치고, 낮잠 시간을 갖고 집안 정리를 하고 해산을 합시다."
"그래 산행시간은 왕복 3시간정도이고 뒷산으로 올라가면 괜찮은 폭포가 있으니 그곳으로 다녀옴세."
"배낭하나로 챙길 짐은 장화아우가 맡고, 지고 가기는 호칠이 아우가 하고, 박처사가 운전을 합시다."
"그럼 두칠이는 뭔데?"
"아하 나는, 나는 뭐... 건달이지 뭐. 참, 길 안내는 내가 해야 하지. 너희들 산길 모르잖아? 선유동이 어디 있는지 알어?"
"선유동은 충청도 어디엔가 있고, 지리산 계곡에 있지 않나?"
"그긴 사람들이 가는 선유동이고 여긴 신선만이 노는 선유동이라 노는 무리가 다른 곳이다."
수월황토방을 지나서 수월 폭포를 지내서 소둔철 마을 공터에 주차를 하고는 안봉천의 발원지를 따라 선유동 골짜기로 산행을 했다. 한 30여분 올라서자 우레와 같은 폭포소리가 산줄기를 휘감아 흘러나왔다. 선유동 삼단 폭포가 장맛비에 수량이 불어나 엄청난 모습을 들어내고 있었다. 모두들 눈이 휘둥그레진다. 박처사 말로는 이런 폭포는 한국에서는 본 적이 없고 미국 나이아가라 폭포를 닮았다나 어쩌다나 믿거나 말거나.
신선들이 선녀랑 놀았음직한 폭포를 조망하는 너럭바위에 오랜만에 나온 햇살을 받고 환한 웃음을 피운다. 배낭 풀어놓고는 맥주 한 캔에 어제 남긴 부침개를 안주로 허허 껄껄, 형님 아우, 자네 여보게, 폭포소리에 목소리가 묻혀버려 저절로 신선들이 되어가고 있었다.
계곡을 따라 더욱 올라가자 거칠던 개울이 잔잔해 지는 평원이 나왔다. 둔철은 산중 고원이면 늪이 발달한 곳이다. 우리들이 따라간 계곡은 사람들이 오지 않는 원시계곡이었다. 작은 옛길은 가다 끊기고 물길을 따라 올라서면 이어지곤 했다. 아름다운 곳이었다. 우리 일행은 다 지리산 묻힌 골짜기 다녀본 사람들이었지만 이런 천혜의 모습을 간직한 곳은 본적이 없다고 입을 모았다.
장화 아우는 걷다 꺾은 영지버섯을 한움꿈 쥐고 있다.
저리 좋은 건 다 찾아내는 산중 나무꾼이 내 아우 장화다.
땀에 흠뻑 젖었지만 숲이 내는 아침의 향기에 몸은 자연인의 모습으로 동화되어 가고 있었다.
"그만 내려갈까? 산막에 가면 노천 목욕탕이 있으니 같이 목욕이라 하지 집안 개울에서."
올라 갈 때는 한 줄로 올라갔는데 내려오면서 먼저 내려가는 사람과 헤어졌다. 없는 길을 따라 올라왔으니 알아서 찾아가야 했다. 그래도 모두들 잘 찾아 내려와 주었다.
점심식사는 광에 캐둔 감자와 풋고추 넣은 수제비를 끓였다. 취사는 장화 아우이고 감나무 농약뿌리는 일은 호칠이 아우와 선 선배가 하고 나는 들랑날랑 거리며 굿은 일만 했다. 그래도 내가 코치 안 하면 부엌일이고 밭일이고 진도 저절로 나가는 일은 하나도 없다. 왜냐면 일머리이며 연장, 재료 놓인 곳은 아는 사람이 나이니까.
안주인이 없는 산막에 안팎이 혼자이니 북 치고 장구 치고, 이불 개고 불 때는 짓 혼자서 해야 하는 곳이다.
2003. 07. 19.
사천의 두칠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