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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레꽃 향기
아침저녁으로 들길을 걸어서 출퇴근하는 지가 일년이 더 되었다.
아파트를 나서면 바로 야산 모롱이를 도는 밭이랑이 긴 콩밭을 지나 벚나무 뽕나무가 가로수로 줄선 길을 백여 보 걸어가면 야산을 횡단하는 오래된 산길이 나온다.
한편의 언덕은 온통 묘지로 조성된 옛 마을 공동묘지이고 낮은 한편으로는 배나무 과수원이 조성된 산길이 가로질러 나 있다.
이 길로 지난 일년 춘하추동 사계절의 변화를 보면서 걸어 다녔다.
바람 불고 눈비 오는 겨울에는 달빛과 별빛이 나랑 걸어 주었고, 가을이면 감홍색 단풍잎과 낙엽이 내 앞에서 길을 열어 주었었다.
그리고 여름이면 푸른 녹음과 논의 무성한 벼이삭이 나날이 자람을 보여 준 길이었다.
어느덧 봄이 오는 듯 싶더니 언덕길에는 아카시아가 피어 흰 꽃송이보다도 먼저 향기로 그윽하게 알려 오더니, 며칠 내린 봄비로 그윽한 향기도 그치고 꽃송이마저 눅눅하게 쳐져 시들어가도 있었다.
그러고 산딸기 꽃이 어느 사이에 피어서 그 가지가지 송이송이에 열매를 맺었고, 어제 밤길을 타고 돌아오는 어둠사이로 혼자 커 버린 달이 구름사이로 배시시 나오더니 맑고 푸른 하늘 한 자락을 보여 주었다.
하늘은 몇 장의 구름이 봄날의 불안정한 기후처럼 떠 있으나, 달은 구름이 있어 운치가 더하니, 달빛이 비추어 준 열린 하늘은 푸르고도 높았다.
물을 댄 논에는 개구리가 끝도 없이 노래를 부르는데, 달은 내가 걷는 산길을 훤히 내려 비치어 길을 내어 주었다. 구름사이로 잠깐 잠깐 나오는 달을 술래하며 산마루쯤에 오르니 어디선가 피어 나오는 라일락 향기보다도 더욱 달콤한 향기가 바람에 묻혀왔다.
나는 잠시 철 늦은 아카시아가 비 온 후 다시 피어 한 밤에 그 향기를 날리는가보다 했는데 아카시아 향기처럼 향기롭다기보다는 달콤한 바닐라향기 같은 냄새가 낫다.
그 매혹적인 달콤함에 자꾸 코를 벌름거리며 숲길이 우거진 언덕길까지 갈 즈음에 구름사이로 달이 다 커버린 보름달이 길섶을 비추는데 온통 하얀 꽃길이 길 앞에 나타났다.
생각하니 며칠 전 출근길에 찔레 새순들이 하도 머리를 서로 올려 솟아오르기에 어린 시절에 먹었던 기억이 되살아 한줄기 꺾어 벗기어 먹은 기억이 났었다.
과수원 밭둑의 언덕에는 아카시아가 살고 그 아래 길섶으로 찔레가 야생으로 자라 산딸기와 자라 다툼을 하고 있는 곳이다.
아! 찔레꽃 향기가 이 한 밤에 달빛에 젖어서 피었구나.
내가 올 줄 알고 향기 내어 알리고 하얀 옷 입히어 내 보내셨구나. 봄의 여신이....
걸어가는 얼굴 높이로 찔레꽃의 행렬이 담을 넘어 넘쳐 나왔다.
달빛에 그 곱고 환한 얼굴을 하고, 작으나 맑은 꽃잎 단장으로, 달짝지근한 찔레 향기를 봄밤에 넘치도록 풍기며 제 철 만난 찔레꽃은 피어나고 있었다.
이 길을 다녔던 지난 일년을 되새겨보니 여름에는 그냥 무성한 찔레줄기만 성가시게 길섶으로 삐쳐 나왔고, 가을에는 까치밥인 빨간 찔레 열매가 알알이 맺혔어도 미상불 찔레꽃이 피어서 나를 즐겁게 해 주리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다녔건만 오늘밤 비가 그친 후 맑은 바람불고 달이 차서 밝아 좋은 날, 날 불러서 이런 꽃잔치를 열어 주리라고 어찌 내가 알았던가?
오월의 여왕 장미가 피는 계절에 장미예찬은 아니하고 하찮은 찔레꽃 타령이냐고도 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만 장미는 화려하고 기풍이야 최고지만 그 향기가 어찌 찔레꽃에 비긴단 말인가?
은은수수하고 순백한 꽃 찔레의 멋을 智人은 알기에 이 아침에 찔레꽃 예찬을 해 보며 가는 봄을 마저 아쉬워한다.
2000. 05.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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