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집에서 키우는 나무를 정원수라 한다.
그 수많은 정원수 중에 제일을 뽑으라면 난 망설임 없이 목서를 고를 것이다.
벚나무 향나무 호랑가시나무 산호수 라일락 동백나무 연산홍 목련 모과나무 소나무 그 헤아림이 수 없지만 목서를 제일로 치는 나름대로의 추억과 기준이 있기 때문이다.
목서는 물푸레나무과의 아열대 활엽수로 사철 푸르고 가을에 꽃망울이 메밀꽃처럼 나무 전체에 딱지딱지 핀다.
그 모양이 곱다거나 화려하진 낳으나, 9월 하순이면 아주 잠깐 피었다가 지는 꽃이다.
다만 그 잎의 무성함이나 나무의 크기는 어느 정원수 못지않게 크고 넓으며 장대하다.
고등학교 저학년 시절에 생물을 가르치는 신 선생님이 계셨다.
하도 성격이 활달하시고 점잖음이 없으셔서 우리들에게 상스런 욕을 교단에서 막 하셨다.
그러고는 이게 다 욕이 아니고 국어 사전에 나오는 생물학적 용어라는 주장이셨다.
허기사 욕의 구성을 보면 대개가 남녀의 성적 은밀한 부위를 지칭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니
틀린 말은 아니였다.
그 선생님의 말씀은 생물이 모든 학과 중에 제일 중요하니 생물 공부를 잘해야 다음에 장가들어 아들딸 알맞게 낳을 수도 있고 행복한 부부생활도 할 것이니 그리 알라고 하셨고,
그 시절엔 아마도 우리들도 그런 동물의 식물의 생리학적 설명에 관심이 많았지 않았나 싶었다.
한번은 생물실습을 신 선생님 댁에 사역 병으로 차출되어 갔었다. 그날의 실습과제는 정원에 풀 뽑고 땅파서 거름주고 여름 꽃들의 화단 정리였지 싶다.
냄새나는 거름 주기며 물 길러 와서 화초에 물 주기 등 그 나이에는 그나마 힘든 노동 이여서 우리들은 게으름을 피우기가 다반사였다.
가을 햇살이 지피는 하오의 정원에서 어디에서 흘러나오는지 모를 은은하고 달콤하고 향기로운 냄새 아니 감미롭기만 한 향기를 난생 처음 맡았다.
그 유혹의 냄새는 몽정한 꿈속의 황홀함이요, 아늑하고 포근한 소년의 이팔청춘의 꿈이었다.
그 냄새의 출처는 바로 신 선생님의 정원수중의 한 나무이었으니 바로 목서 라는 명찰을 달고 있었다.
순백색의 개망초꽃 같은 꽃송이들이 향기를 내고 있었다.
꽃이 필 것 같지 않는 상록 활엽수가 그 푸른 잎사귀를 덮으며 한가득 피어나고 있었다.
그 뒤에 선생님에게 배운 것은 순백색 꽃이 피는 놈은 은목서고 샛노란 꽃을 피우는 놈은 금목서라 그 희귀성과 번식력이 신통찮아 예로부터 고관대작의 정원수나,
나무를 사랑하는 이로부터 특별한 대접을 받아왔다고 했다.
아침저녁으로 산책을 하다 우연히 그 옛날 목서를 시골집 마당에서 만났다.
고관대작 집도 아니고 정원도 아니고 그냥 마당 가운데서 지붕 위까지 자란 목서 한 그루였다.
산책중 샘물이라도 얻어 먹으려고 그 집에 들렀는데 목서가 있었다.
한눈에 목서인 것을 알았다. 꽃도 피지 않았는데 삼십 년을 거슬러서 그 옛날 신 선생님 댁에서 보았던 목서를, 나무와 잎만 보고도 알았다.
그러나 꽃이 언제 피는지 금목서인지 은목서인지는 알 수가 없어
주인 아주머니에게 여쭈었더니 목서를 알아보는 사람이라 무척 기뻐하면서 9월 말경에 황금색 꽃이 피니 그 즈음에 목서 냄새가 이 마을을 감싸고 있을 테니 꼭 다시 오라고 하셨다.
9월 하순에 추석 연휴도 있었고, 금년엔 철이 늦기도 하여 차일피일 미루다 오늘 아침 산책길에 들렀더니 노오란 꽃들이 낙화되어 마당에 가득하고 잎사귀 위로 꽃이 얼마나 피었는지 나무가 노란 황금빛 이였으나 냄새는 아무리 코를 대고 맡아도 없었다.
내가 냄새 없음을 못내 아쉬워하자, 꽃이 피고 냄새가 마을 어귀까지 피어도 온다는 사람은 안 나타나고 저 꽃들이 다 떨어져 낙화가 되어가는데...
혹 전근이라도 가셨나했는데...
냄새는 없어지고 빈 꽃들만 가득하다고......
내가 때를 맞추어서 와 주질 못 했음을 못내 나보다 더 서운해 하셨다.
아뿔싸, 미루지 말고 한 주만 일찍 와 볼 걸 그랬나.
나오면서 꽃을 다시 쳐다보니 그 만개한 목서나무 속에 그 옛날 교복 입고 신 선생님 댁에서 보았던 목서꽃의 화려함이 보이고 이제는 돌아 가셨다던 신 선생님이 보이고 그 시절이 그리워,
그 황홀한 냄새를 못 맡은 아쉬움은 없어지고 목서의 추억만 남아 내 가슴에서 향기로 피어오르고 있었다.
목서 냄새야 금년에 못 맡았으면 내년에 맡으면 되는 것이지만 떠나가신 신 선생님은,
가버린 내 젊음은 내 청춘은 다시 오지 않으니 다만 아쉽고 그리움만이 목서가 갖고 왔으니 다 어쩔 수가 없는 일이로다.
9월이면 피는 꽃, 목서에 대한 나의 애틋한 정과 추억을 논하고 보니 나도 이제 우리 집 뜰에 목서 한 그루라도 심어야겠다.
고관대작의 집이 아니라도 작은 내 집 뜰에 목서 한 그루를 심어서.
가을이면 그 황홀한 젊음의 꽃 냄새를 맡으며, 내 지난 추억을 곰 씹 수가 있으니 말이다.
<1999. 10.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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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학 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