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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산꾼이었다. 나이는 엇비슷하지 싶은데 모습은 나보다 더 먹어 보였다. 설악산에서 고생한 이야기면 지리산에 야생 곰이 산다며 호랑이도 산다고 했다. 지리산 호랑이는 사람이 키우다 놓친 호랑이라 사람을 해치지는 않지만 왕시리봉 자락에는 있다는 이야기며, 하봉 아래 광점리로 해서 얼음골로 70년대 초반에 올라갔었는데 그 때는 길을 몰라 나무꾼을 앞 세워서 올라간 적도 있다고 하니 그는 오래된 산꾼이었다.
헌데 오늘은 왜 하산을 하는지 묻자 그는 왠지 세석산장에서 자는 것이 싫어서 내려온다고 했다. 그리고 거림 골짜기 길이 초행이라서 몸이 비에 젖고 젖은 몸으로 사람들과 부딪기여 산장 잠을 잔다는 것이 싫어 혼자 야영을 할 생각이라고 했다. 산 아래에서 야영을 한다니 막차와는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마음이 그래도 바쁘니 자꾸 앞서서 걷는다. 날이 저무니 날 보고 먼저 가라고 하지는 못하고 부지런히 뒤 따라 걸었다. 한시간이나 내려오니 물길이 넓어지고 하늘이 열려있었다. 길가 너럭바위에 걸터앉았다. 그와 나는 어제 오후에 산에 들어가서 그는 천왕봉 동쪽 대원사코스로 올라서 왔고 나는 천왕봉 서쪽 노고단코스로 왔으니 둘이 걸어온 길을 합하면 지리산 종주길이 되는데 그도 나도 내일이 남았건만 적당히 그만두고 하산하는 이십 년 이상 된 산꾼들 이었다.
우린 한시간여 둘 다 지친 몸을 이끈 노병이 되어서 이야기하면 산길을 걸어 내려왔지만 이름 한자 얼굴하나 제대로 기억 못 하고 헤어지고 말았다. 산에 가서 만나고 헤어지는 사람은 이런 경우가 대부분이다. 내가 그가 동행하다 사고를 만나면 우린 내 부모형제처럼 그를 도우면 구할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아무런 조건이 없다. 우리가 운전을 하다 사고를 만난다면 사람을 구하는 일에 내 일처럼 달려들지는 않는다. 허나 산길에서 그런 일이 생기면 누구든지 자기 일이 되는 것이 산행이고 산꾼이다.
인간은 자연 속에 살아야 더욱 자연스러운 인간적이 인간이 되는 길이다. 산에는 인간세상처럼 계산하지 않는다. 산에는 어차피 자연 속에 존재하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산에서는 오직 산다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이 자연 속에 사는 하나의 작은 존재 생물에 불가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유한하다. 저 자라나는 나무 하나의 생명보다 연약하고 짧은 것이 인간의 삶이다. 그리고 존재의 수도 저 나무의 수보다도 작다. 비바람 눈보라가 치면 저 나무 한 그루보다도 견디며 살기 어려운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아무 것도 아니다.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인간이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란 말만 만들어 떠들고 있다. 그러니 정말 존재다운 존재가 되려면 존재의 실제를 제대로 알고 그 던져진 존재 속에서 존재하는 존재로 살다가 가는 것이 바른 삶일 것이다.
내가 오늘 가진 것이 과연 내 것일까?
내일도 나의 것이고 백년 후에도 나의 것일까? 그리고 오래 전부터 나의 것이었을까?
우리가 내 것이라고 갖고 소유라는 것들 다 빌려쓰는 것들이다. 내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 하물며 이 거죽 같은 몸뚱이도 빌려쓰고 있는데 내가 가진 것이 무엇하나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우린 어느덧 거림골 마지막 자락을 알리는 수백 년 되는 노송이 바위 길에 서서 골짜기를 내려다보는 곳에 섰다. 우린 골짜기의 마을과 민박산장들이 보이는 어스름 저녁의 산골마을 정경을 내려다보며 긴 산행의 여정을 접는 마무리 시간임을 말은 없어도 알고 있었다.
관리소 매표소 직원이 낯익은 사람이었다. 반가워서 악수를 하고 버스시간을 묻자 지금이 6시이고 5시 50분에 출발했다고 한다.
그래 차라리 잘 된 일이다. 어차피 세석상회 형님 문병은 가야하니..
동행한 서울 산꾼은 근처 야영장에서 잔다고 했고 많이 지쳐 보였다. 내가 더욱 지치게 만들지는 않았는지 모르겠다. 세석에서 내려오는 거림골과 촛대봉과 연화봉에서 내려오는 도장골 물이 쌍계를 이루어 여기 거림마을에서 만난다.
장마가 온다기에 떠난 지리산 이틀간의 짧은 시간이 이토록 길고 먼 산길 이야기가 되었다.
우리가 살면서 이틀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마는 시간이다.
헌데 산을 가보면 우린 정말 하루에도 멀고도 아득한 길을 걷는다. 그리고 수많은 이야기와 생각을 하면서 살 수 있는 시간이다.
힘들고 어려우면 어려운 만큼 우리에게는 다른 보너스를 주는 것도 바로 사람 사는 일에는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사는 일이 힘들면 어려우면 그냥 떠난다.
산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날 기다려준다. 산의 품에 나를 집어넣으면 산은 나를 포근히 아늑하게 그리고 언제나 넉넉하게 안아주고 가르쳐주고 일으켜주고 치유를 해 준다. 언제나 그랬듯이 지금도 그러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산, 산, 지리산.
말없는 산에는 언제나 넓고 깊은 산자락이 있어 나는 행복하고 그래서 산 속으로 들어간다.
끝
2002. 07. 12.
사천의 두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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