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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노래 소리도 빗소리에 묻히고 오가는 사람도 이제는 뜸하였다.
선비샘을 지나 덕평봉, 칠선봉 구간은 지리산 종주구간 중에 가장 험난하고 산골이 깊은 곳이다. 산골은 아니고 산 속 깊은 곳이다. 깊다는 말은 인가에서 근접하기가 멀고 험하다는 말이다.
여기서는 인가로 갈려면 두어 시간 걸려서 세석으로 가든지 아니면 걸어온 벽소령으로 되돌아 나가든지 해야한다. 벽소령까지 한시간, 벽소령에서 의신이나 삼정까지 또 2시간이상은 소요되는 위치이다. 여기서 하산을 하는 일이 생긴다면 적어도 앞으로 4시간은 잡아야 인가에 도달한다는 결론이다.
바위를 돌고 줄사다리를 잡고 오르고 철 계단을 몇 개나 올라야 하는 곳이기도 하다. 허나 그런 산 속이기 때문에 산이 보여주는 웅장함과 비경은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아름다운 곳이다. 혹 저기 설악산의 기암절벽을 상상하시지는 말기 바란다. 지리산은 둥글고 펑퍼짐한 흙산이라고 했다.
설악산이 마르고 날카로운 아버지 같은 산이라면 지리산은 허리 굵고 엉덩이 큰 어머니 같은 산이다. 펑퍼짐하게 내려앉은 길고 넓은 형상의 산자락이 펼치는 아름다움을 그려보기 바란다.
산 줄기 줄기, 산 골짜기 짜기들이 어쩌면 이다지도 조화를 이루고 변화를 이루어 모나지 않고 밋밋하지도 않고 올망졸망 굽이를 만들었을까.
칠성봉 바위 끝에 오늘은 앉을 수가 없었다. 빗물이 바위에 물 기름칠을 해서 잘못하여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그만 수십 수백 길 아래로 수해로 떨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해서 철 사슬을 잡고 여름비에 목을 추기는 나무들의 환호성을 오늘은 내 목소리 대신 들어야 했다.
비상용으로 준비해간 1,000원 짜리 비닐 비옷을 입을까 말까 하며 비를 맞고 걸었다. 빗줄기가 굵어지기 시작해서 꺼내 입어보니 그냥 맞고 가는 편이 마음 편할 것도 같아 다시 벗어 넣고는 땀 줄기를 빗줄기에 태워서 흘러보냈다. 벗은 몸 말리는 것이 젖은 옷 말리는 것 보다 여름에는 쉬운 노릇이다.
사람이 이처럼 뜸한 건 저쪽 세석에서 오는 사람도 산장에서 머물고 이쪽에서 가는 사람도 벽소령에서 머물기에 비오는 날 산길에는 인적이 더욱 드문 셈이다.
나도 이제 마음을 정해야겠다. 여기서 한 두어 시간이면 세석에 도착할 것이다. 그러면 4시경이고 천왕봉을 간다면 7시가 넘어야 하고 다시 중산리로 하산을 한다면 10시경이 될 것이다. 비만 오지 않는다면 이 몸 부서지기야 하겠나하고 가겠다마는 아무래도 진주로 그냥 돌아가고 싶었다.
그래, 거림으로 가자! 거림골 세석상회 형님이 편찮으시다는데 난 아직 문병도 못했지 않는가. 그리 마음을 정하니 마음이 점점 바빠지기 시작했다. 나는 천천히 걸을 수가 없었다. 거림서 진주 가는 막차 시간도 어찌되나 싶기도 하였고 해서 이제부터 속도를 내서 걸었다. 영신봉 자락으로 올라서니 평원 한 자락이 발 앞에 머문다.
풀밭은 숲길과 사뭇 다른 풍광이다. 풀밭은 시야가 좋다 그리고 바람이 불어온다. 풀밭은 꽃이 핀다 그리고 내가 풀보다 키가 크다. 풀밭은 걷고 싶지 않고 구르고 싶다. 풀밭은 산보다 하늘이 크고 넓다. 나는 산 속의 고원을 이룬 세석 같은 풀밭을 좋아한다.
지리산 능선에는 드물지만 이런 곳이 몇 곳이 있다. 고원처럼 아름다운 만복대, 하봉 아래 웅석봉 가는 왕등재 습지, 제석봉 고사목 지대의 평원, 그리고 마지막으로 노고단 분지이다.
내가 지금 이 풀밭을 기억해 내면서 수십 초 동안 지리산 종주 능선을 왔다 갔다 왕복해 버렸다고 한다면 여러분 믿겠는가? 난 방금 그 길들을 순식간에 다 기억해 내면서 걸어간 것이다. 아니 날아간 것이다. 이건 걸어도 날아도 불가능한 것이니 무어라고 해야하나 그러나 마음으로는 가능하지 말이다.
영신봉 아래는 낙남정맥 종주길이 오롯이 보였다. 세석평원을 보호하는 나무 말뚝이 오케이 목장의 담처럼 막아두었지만 나는 마음만 먹으면 들어갈 수도 있고 길도 찾아서 내려갈 수 있다만 이슬 맺힌 풀잎들이 내 잠방이를 적힐 걸 생각하니 그만 두고 산장이 아름다운 평원이 넓어서, 산장이 더욱 아름다운 세석산장의 나무 식탁에 앉아 평원의 그림을 본다. 시네마스코스 입체화면이 두 눈으로도 모자라는 시각으로 꽉 찼다.
초목이 푸른 산중 풀밭에 비가 내린다.
아아.. 아름다움에 목이 메인다. 눈이 시리다. 저 빗물 속에 녹아 들고싶다. 그리고 아름다운 세석의 맑은 물이 되어 나무의 식수가 되어 나무가 되고 싶다. 난 나무가 되고 싶은 사람이다. 나는 죽어 다시 태어난다면 꼭 나무로 태어나고 싶다. 그리고 이 지리산 산중에서 오래 오래 죽지 않고 사는 외롭고 우뚝 선 굴참나무가 되고 싶다.
사천의 두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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