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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등산복이 젖는 것이 아니라 산이 다 젖고 있었다. 산이 젖으니 나무도 젖고 바위도 젖고 풀도 길도 젖어드니 이제 걸어가는 내 발도 젖더라. 젖은 발로 젖은 길을 걸어가니 미끄러지기도 예사 일이 되더라.
노부부가 정처 없는 길을 걸어가도 있었다. 아저씨는 손잡이가 굵은 우산을 혼자 받쳐들고 아주머니는 비옷을 입었다. 앞서거니 내가 좀 쉬다 가면 뒤서거나 하며 외길인 산길을 갔었다. 먼저 걷던 내가 길 곁에 걸터앉기 좋은 바위자리에 아름드리 나무하나를 등짐으로 기대고 만사 시름 놓고 세상에서 제일로 편한 자세로 내리는 비를 맞고 앉았다. 하염없이 내리는 비를 맞고 앉은 길손은 김소월의 왕십리를 척 한 수 거침없이 읊었다.
비가 온다
오누나
오는 비는
올지라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여드레 스무날엔
온다고 하고
초하루 삭망(朔望)이면 간다고 했지.
가도 가도 왕십리(往十里) 비가 오네.
한 호흡에 주르륵 빗줄기 같이 척 외고 있노라니 그 부부는 마냥 넋을 잃고 내 앞에 우산대를 접고 턱하니 서서 바라본다.
웬걸, 저 새야
울려거든
왕십리 건너가서 울어나 다고,
비 맞아 나른해서 벌새가 운다.
천안(天安)에 삼거리 실버들도
촉촉이 젖어서 늘어졌다데.
비가와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구름도 산마루에 걸려서 운다.
그 아저씨 저 빗소리처럼 처량하게 읊어대는 나를 유심히 바라봐 주는데 더욱 더 흥에 젖어, 노래 부르듯이 읊어대는 나를 보고 하는 말이
"방랑시인 김삿갓 같소이다."
이러는 것이 아닌가?
이 아저씨 보아라. 내가 이처럼 듣기 좋아하는 소리인줄 어찌 저리 잘 알고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일까? 나는 떠나가는 아저씨를 뒤따라가며 노래 한 자락을 불렀다. 비 맞아 나른해져서 내 기분에 빠져 불렀다.
죽장에 삿갓 쓰고 방랑삼천리
흰 구름 고개 너머 가는 객이 누구냐?
열두 대문 문밖에서 걸식을 하여도
술 한잔에 시 한 수로 떠나가는 김삿갓.
오가는 사람들이 내 노래 소리에 비 맞아 나른함을 잊기나 하듯이 따라 부르기도 하도 손뼉을 치기도 하였다. 산중에 비 소리에 도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지고 온 술이 다 떨어졌구나. 할 수 없는 일이다. 안 마시고도 마신 척하면 사는 것이 산길이다. 흥도 오르고 배도 부르고 비도 오는 날이니 한 곡 더 부르고 말지.
참 누가 불러달라도 청을 한 것도 아닌데 내 흥에 내가 겨워 진주난봉가를 한 수 불러보았다. 올만에 부르니 가사가 아물아물해도 익혀가며 새겨가며 불렀다.
울도 담도 없는 집에서 시집살이 삼년 만에
시어머님 하시는 말씀 얘야 아가 며늘 아가
진주낭군 오실 터이니 진주 남강 빨래가라
진주 남강 빨래가니 산도 좋고 물도 좋아
우당탕탕 빨래하는데 난데없는 말굽소리
옆눈으로 힐끗 보니 하늘같은 갓을 쓰고
구름같은 말을 타고서 못 본듯이 지나더라
흰 빨래는 희게 빨고 검은 빨래 검게 빨아
집이라고 돌아와 보니 사랑방이 소요터라
시어머니 하시는 말씀 얘야 아가 며늘아가
진주낭군 오시었으니 사랑방에 나가봐라
사랑방에 나가보니 온갖가지 안주에다
기생첩을 옆에 끼고서 권주가를 부르더라
그것을 본 며늘아가 건넌방에 물러나와
아홉가지 약을 먹고서 목매달아 죽었더라
이 말 들은 진주낭군 버선발로 뛰어나와
내 이럴줄 왜 몰랐던가 사랑사랑 내 사랑아
화륫 객정은 삼년이요 본댁 걱정은 백년이라
내 이럴 줄 왜 몰랐던가 사랑사랑 내 사랑아
어화둥둥 내 사랑아
어느덧 벽소령 고개 마루 위에 앉아있었다.
벽소령 산장 마당 나무 식탁에는 점심을 먹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사천의 두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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