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내가 먹고사는 내 사무실 책상 유리판 아래는 지리산 산지도가 칼라 판으로 들어있다.
나는 지리산 능선과 골짜기 골짜기를 그림으로 표시된 등산로를 다 다녀 보았다. 그리고 그냥 산줄기를 타고 마음으로 하루에도 몇 번 씩 오르락내리락 이 골 저 골을 다니곤 한다. 언제 보아도 마음 흐뭇하고 지겹지 않는 곳이기에 내가 들어가 살고자 한다.
허나 산이 좋으면 평지가 없고, 물이 좋으면 햇살이 모자라고, 조망이 좋으면 아늑하지 못하고, 기암이 많으면 흙이 모자라니 내 욕심을 채울 곳이 정녕 있기나 한지 모르겠다. 깊은 산중이면 사람이 없고, 사람이 많으면 복잡하고 시끌벅적하니 이게 있으면 저것이 모자라고 저것이 있으면 이것이 모자란다 말이다.
허나 가긴 가야하니 하나를 얻기 위해서 하나는 버려야 하는 이치이니 조만간 결정은 할 것이다.
하여간에 지금 어디까지 걸어왔더라 다시 책상 위 지도를 살펴보자. 칠불사 절 위의 봉우리 토끼봉에서 아침을 먹었구나. 9시에 출발하여 연하천 산장까지 약간 내려가는 듯 하는 평지 길이었다. 숲길이었다. 연화천이 가까워져서 명선봉을 올라서니 산의 훼손을 막자고 원목으로 다리 계단을 숲길에 놓았다. 좌우로 온갖 산나물들이 이제 꽃대를 올릴 준비를 하고 있다. 여름이 오기도 전에 가을을 준비하는 이 산의 식물들이다. 하늘은 흐리고 기온은 서늘하여 별로 힘드는 줄 모르고 걸었다. 잎사귀 넓은 곰취가 보이더니 잎새가 나비를 부르는 붉은 조끼를 입은 듯 잎들을 엮은 나무들도 있었고 바람에 쓰러진 함박꽃나무에도 돌 바닥에 기대어 하얀 꽃을 피웠다. 꽃이 필 때는 아무리 상황이 힘들어도 꽃은 피워야 하는 것이다. 사람도 그 시기가 오면 놓치지 말고 행하여야 한다. 저 꽃을 보라. 저 나무를 보라. 때 놓치고 말면 한 해 그냥 보내야 한다는 걸 알고서 할 짓 다 하지 않느냐. 토끼봉에서 연하천 산장까지 한시간 반 걸리는 거리를 한시간 남짓하여 왔었다.
언제 와도 연화천의 뜰에는 사람소리로 왁자지껄하였다. 연화천이란 물이 난다는 곳이니 샘물로 목을 축였다. 그리고 참외를 깎아서 곁에 앉은 사람과 나누어 먹었다. 여름철 산행에는 적당히 갖고 다닐 과일이 참외 외는 없다. 사과가 좋긴 하나 겨울 과일이고 복숭아는 아직 철이 일러 나오지 않았고 수박은 무겁고 토마토는 무른 과일이라 운반이 용이하지 못하고 오이는 내가 좋아하지 않는 과일이다. 그래서 여름에는 참외, 겨울에는 사과를 찾는다.
고관대작의 뜰 같은 연하천의 마당에는 오래된 주목들이 정원수로 자란다. 돌로 지은 산장 앞마당에는 맑은 산중 샘이 솟고 너른 뜰에는 주목이 여기 저기 자라나는 곳이어서 예전에는 주목나무 아래서 자리를 펴고 식사를 하고 한 숨 잠을 자고 가던 곳이기도 하다만 지금은 산장 앞 야외식탁에서 비좁게 앉아서 밥을 먹고는 일어나야 한다. 그 너른 마당에는 주목을 보호하기 위해 주목보호 울타리를 쳐서 마당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모두 쉬는 곳이니 천왕봉 쪽에서 올라온 사람은 다리 계단을 밟고 올라가야 하고, 나같이 천왕봉 쪽으로 가는 사람은 주목 울타리 사이 길을 따라 내려가야 했었다. 어김없이 올라온 사람은 올라가고 내려온 사람은 다 내려가는 것이다. 한 사람도 어김없이 자기 갈 길을 찾아서 지나갔었다.
벽소령까지는 두 시간 거리이다. 허나 그리 높은 곳을 올라가지 않고 약간 올랐다가 내렸다가 올랐다가 하면 가는 코스이다. 아무래도 이 종주능선에서 조망이 좋은 몇 몇 코스 중에 하나가 바로 여기이다. 제일인 곳은 천왕봉에서 장터목가는 연화봉이고 다음은 우리가 가야할 벽소령에서 세석고원 가는 능선이고 그리고 지금 우리가 앞으로 지나야 할 형제봉 코스이다.
바위 두 개가 산정 능선에 서 있는 형제봉을 지났다.
비가 가늘게 부슬부슬 내렸다. 아이가 반대쪽 방향으로 걸어왔다. 박수를 쳐주고 칭찬을 하였다. 아이는 무표정인데 아이 아버지가 반가워하며 좋아했다. 아, 저런 것이 바로 부모 마음이구나. 남녘으로 내려다보는 조망이 좋은 너럭바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는 능선 종주를 하면 항상 앉았던 자리에 앉는 습관이 생겼다. 길을 익혔으니 다음에는 어디 나올 것이다는 걸 생각하고 그 자리가 나오면 꼭 쉬어 갔었다. 대개가 조망이 좋은 바위에 배낭을 벗어놓고 마음을 걸어놓고 무심으로 산 건너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다. 무얼 생각하고 무얼 고민하고 그런 일이 아니다. 그냥 바라볼 따름이다. 편안하고 아름답다고 느끼니 마음이 평온해진다. 이런 맛 때문에 산행을 하지 싶다.
오늘의 화두는 이것이었다.
내가 산을 찾아가야지,
어찌 산이 날 찾아오겠는가!
이처럼 평범한 말이 입에서 맴돌아 나왔다.
실로 제법 오랜만에 지리산 종주에 나서니 이런 것도 배우고 깨닫는구나 싶어 재빨리 수첩을 내어서 문장을 적어두었다.
사천의 두칠이
| |
| |
윗글 :
13  "무등 태우다", "무동 태우다"
| |
| |
밑글 :
11 오랫만에 인사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