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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숫가루와 낡은 추억
김 연 순
한여름 무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에도
바닷가 마을은 육지만큼 후덥지근하지 않다.
해질 무렵 산을 휘몰아 굽이치는 바람은
시원하다못해 서늘하기까지 하고 베란다에서
내려다 보이는 해수욕장의 네온사인들은
보석처럼 영롱해서 남편과 나는 차가운 미숫가루 한잔씩을
손에 들고 그 시원함을 즐기곤 한다.
살아온 몇십년동안 나는 미숫가루를 좋아하지 않았었다.
칼칼하게 입천장에 달라붙으며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찝찔함이
무척 싫었기 때문이었는데 미숫가루에 대한 나의 이러한 생각은
몇년전 이웃에 살던 혜림엄마로 인해 완전히 바뀌고 말았다.
혜림엄마의 미숫가루에는 아름다운 얘기꺼리가 있다.
내가 남편과 결혼해 인구 몇만의 작은 도시에서 산다고 하자
친구들은 백화점도 없는 그런 곳에서 어떻게 살겠냐며
놀릴 만큼 나는 겉멋이 잔뜩 든 눈높은 여자였다.
마음에 드는 물건이라면 가격에 상관없이 덜컥 사버리곤했고
그러다 싫증이난 물건들은 집안곳곳에 굴러 다녔지만
비싼 돈이 아까워 버리는 일도 쉽지 않았었다.
하지만 신혼시절부터 지금까지 열 번의 이사를 거치며
어느 틈엔가 나는 살림살이에 대한 욕심이 점점 없어져 갔다.
아무리 비싸고 좋은 가구라 할지라도 몇 번의 이사를 거치고 나면
죄다 망가져버린다는 것을 체험하면서 나는 남들이 쓰다가 버린
물건들을 적당히 고쳐 쓰는 일에 재미를 붙였다.
무료한 일상들이 지루할 때면 집안을 온통 휘저어
분위기를 바꾸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이웃아줌마들은
이런 것들을 죄다 어디서 구했냐며 신기해하곤 했다.
아이들이 커가며 옷을 넣어둘곳이 마땅치 않았을 때에는
커다란 냉장고 박스를 집모양으로 개조해 벽돌모양의 벽지로
도배를 하고 전깃불도 달아 필요한 물건을 넣거나 들어가 놀 수 있도록 했고,
케이블을 감았던 커다란 원통일랑 줏어다 거실에 놓아두고 탁자로 썼다.
언젠가는 이웃에서 버리는 장농을 얻어다 허물어진 곳은
지점토로 메우고 분홍색 랙커를 칠했더니 아주 깜찍한 모습으로 변했다.
기왕이면 구색을 맞추자고 딸아이 방문과 창문을
분홍색으로 칠해 남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한번은 아이의 책꽂이가 부족해 새로 살려니 이삿짐만 늘겠고
크기도 적당치 않아 고민 중이었는데 퇴근하던 남편이 작은
선반하나를 줏어왔다.
자세히 살펴보니 페인트를 칠해 다시 쓰려다 얼룩이져서 버린거였다.
남편과 나는 못쓰는 천조각을 작게 잘라 풀을 쑤어 꼼꼼히 붙였다.
빨간 체크무늬가 아주 예쁜 이 책꽂이는 오늘도 작은아이의
침대 앞에 얌전히 서있다.
혜림엄마와는 영천에서 살 때 만났다.
동그란 얼굴에 까만 눈을 가진 모습이 마음에 들어
사귀게 되었는데 아래 윗집에서 살며 친하게 지냈다.
우리집에 놀러 올 때면 분홍색으로 칠한 딸아이 장농이 예쁘다며
내솜씨를 칭찬해 함께 웃곤 했는데, 이사를 하게 되고
딸아이의 방이 좁아 장농을 혜림엄마에게 주고 왔더니,
고맙다며 손수 만든 미숫가루를 소포로 보내왔다.
고소함과 따스함이 베어있던 그 마음때문에 나는 미숫가루를
좋아하게 되었고,우리아이들의 작아진 옷을 물리면
어떨까란 조심스런 나의 말에 물론이라며 활짝 웃었다.
계절이 바뀔 때면 나는 아이들 옷장을 정리하고 혜림엄마에게로 간다.
동구 밖까지 배웅하러 나오는 혜림엄마의 뒷짐진 손에는
미숫가루 꾸러미가 들려있다.
나 몰래 얼른 차에다 넣어두고는 그냥 배시시 웃는다.
정성이 담긴 가루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 가슴은 따뜻함으로 가득차고 사이좋은 이웃으로
지내던 날의 추억들이 떠오른다.
내게는 이렇게 버린 물건들로 인한 아름다운 얘깃거리들이 있어
때로 나를 행복하게 한다.
어쩌면 내 아이들도 엄마아빠가 만들어준 그 낡은 집의 추억
때문에 언제까지고 행복해 할 것이며,
세상 모든 사람들도 저마다 옛일을 생각나게 하는
낡고 소중한 물건들이 있어 그들을 행복하게 할 지 모른다.
ELTON JOHN - CROCODILE R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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