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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길들이 익숙하고 아는 길이었다. 이 길을 많이도 다녔구나. 모르긴 해도 10번은 더 지났을 것이다. 들꽃들이 피었다. 노루오줌풀, 꿀풀, 비비추, 범꼬리, 까치수영 형형색색 갖은 풀들이 이 평원 같은 돼지령에 자란다. 돼지령은 상당히 긴 산정 평원이다. 산돼지가 자주 올라와서 놀고 간다는 곳이라 돼지령이다. 영이라면 산고개인데 고개 길이가 길다보니 능선 같은 평지가 30여분 계속되는 지리산의 야생화의 천국이다. 철이 좀 일러서 그렇지 7월 하순 8월에 오면 원추리가 많았던 곳이다.
노고단에서 한시간여 걸려서 임걸령에 왔다. 임걸령에는 임걸샘이 있다. 주능선에 이런 샘이 있는 곳은 저기 선비샘 정도인데 사실은 임걸샘이 더욱 능선에 있는 샘이다. 임걸령 너럭바위에는 어디서 언제 올랐는지 아니면 여기서 야영을 한 일행인지 십여 명이 아침을 먹고 있었다.
임걸샘은 마치 어느 산사의 고요한 아침 샘가처럼 맑고 아름다운 물이 물 대롱을 타고 흘러서 돌 항아리에 넘쳐흘러 나무 홈통의 물길을 타고 가다 물 구유에 한번 더 고였다가 땅으로 흘러내리도록 멋진 배치를 하였다. 누가 언제 했는지 모른다만 이리 높은 산에 돌 항아리를 지고 올라왔으며 나무 대롱과 구유는...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의 향기가 절로 배여 나온다. 아무래도 임걸령에는 그 옛날 임걸이란 산 거인이 살았던 곳이지 싶다. 나는 지고 온 노고단 물은 버리고 임걸샘에서 아침을 머금고 솟아나는 물을 물통에 다시 받고는 눈도 안 씻어든 얼굴을 이제서야 나무 구유에서 떨어지는 샘물로 닦았다. 내 다 알고 이런 곳에서 세수하려고 미루어 둔 일이다 싶어 새삼 내 지혜에 감탄을 하고는, 허기사 게으름이라고 아니하고 지혜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지기에 이런 일도 사람 생각하고 마음먹기 나름이구나 싶었다.
그래 또 가자 갈려고 나선 길인데 어쨌든지 걸어보자. 이 발이 부르트나 저 길이 모자라나? 아침 식전이라 물로 배를 채우고는 시계를 보니 6시 반 아직은 아침을 먹을 시간이 아니었다.
이제 길은 숲길이었다. 소나무가 늙어서 가는 길을 막고 쉬어가라고 붙잡는다. 벌써 주저앉아 지체 할 수는 없다. 돼지령에서 잠시 햇살이 비쳤는데 여기는 아직 어둑어둑하며 산 이슬이 잠방이에 젖어 들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날이 개이지는 않을 것 같았다. 지금이 6월말이면 햇살 비치는 여름날 뙤약볕보다야 이렇게 흐린 날이 걷기도 좋고 땀도 덜 나는 날이다. 너무도 산 그림이 청정하고 푸르렀다. 휘파람새 울음이 나를 따라오면 울어댄다. 내가 즐겨 부르는 휘파람새의 휘파람소리.
어느새 노루목 삼거리에 성큼 다다랐다. 노루목 풍광은 수해와 산중의 자태가 아름다운 곳이다. 삼거리에서 남녘을 바라보니 산 산 산 산들이 화선지 뒤에, 그 뒤에 산 산들의 그림이 접혀 펼쳐지는 산중 동양화 화폭이었다. 구상나무와 잣나무 바위사이에는 노란 돌 양지가 돌 틈에서 꽃을 피운다고 정신이 없다. 내가 다가가서 곁에 앉는 줄도 모르고 꽃향기 피운다고, 가는 6월이 아쉽다고, 바쁘다고, 곁눈 팔 시간이 없다고, 여기도 한 무더기 저기도 한 무더기 돌 속에 피어난다.
노루가 나타나면 여기 삼거리에서 임걸령 포수가 임걸령에서 쫓아오면 노루는 천왕봉으로 달아나지 않고 좌측으로 산을 보고 오르면 바로 반야봉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그래서 임걸 포수는 달아난 노루를 가다리며 쉬는 곳이 노루목이다. 목이란 길목이란 우리말이 아닌가?
이 능선에서는 한 시간이나 가면 또 고개나 마루나 갈림길이나 재미있는 쉼터가 나오니 여기에서 길가는 것은 그래도 걸을만하다. 나그네가 많은 철에는 여기에 둥글래 약차를 오고가는 사람에게 팔던 곳이 바로 노루목이다. 그러고 보니 댓잎 같은 잎사귀를 땅에 붙어 자라는 둥글래 꽃이 잎사귀 아래에 연한 미색의 초롱을 조랑조랑 달고 피어나는 철이 바로 지금의 지리산 종주길이다.
산에는 휴일의 산에는 사람들이 분주하다. 천왕봉으로 가는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천왕봉 쪽에서 노고단으로 오는 사람도 있다. 지금 그들은 백소령이나 연화천 산장에서 지난밤을 보내고 마지막 코스인 이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오늘은 대개가 노고단을 거쳐 하산을 하는 사람들이고 나처럼 노고단에서 천왕봉으로 가는 사람이라면 오늘밤은 산중 어느 산장에서 하루를 더 묵고 가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왜냐면 내일은 월요일이지만 임시공휴일이라 쉬는 날이기 때문이다.
화개재를 지났다. 화개재는 뱀사골에서 올라오면 뱀사골 산장 위에 있는 재 이름이다마는 이름은 하동의 화개 이름을 따서 화개재가 되었다. 그러니 남으로 하산을 하면 의신마을을 지니고 쌍계사를 지나 화개까지 가는 재이다.
사천의 두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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