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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과 ‘몽유도원’ 사이―김신용, 『몽유 속을 걷다』(실천문학사)
김신용은 집 아닌 거의 모든 장소를 집으로 삼아 살아온 시인이다. “곡괭이로 시를 쓸 수 있는 세계를 향해 걷”(「내 뼈의 가지에 寒苦鳥」)는 동안 그의 집은 공사장 함바, 무허가 판잣집, 일세방, 공장, 시장 골목의 밥집과 술집, 감옥 등으로 쉬임없이 바뀌어왔다. 김신용에게 한 곳에 뿌리박힌 집은 간절함과 동시에 깊은 좌절의 대상이었다. 오랫동안 그의 의식이 거처한 집은 무덤, 즉 노동자와 인간의 무덤이자 훼절한 역사와 시대의 무덤이었다. 김신용은 이를 『개같은 날들의 기록』(1990)에서 “꿈을 꾸고 나면 더 허기가 져,/아무리 둘러봐도 허물어져가는 집,/(……) 마치 관 속 같아”(「불알 두 쪽」)라고 토로해놓고 있다. 집이 없기에 그는 집을 지었다. 그러나 일당 몇 푼에 소금땀을 쏟으며 수십 채의 집을 지어도 집은 그의 것이 되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집은 신성한 노동이 아닌, 칼날 같은 돈으로 세워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신용은 “뜯겨 흩어진 꿈의 잔해 속에서”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삶의 집을”(「순환회로」) 짓는다. 그가 지으려 하는 집은 살과 뼈로 이루어진 스스로의 몸의 분신이다. “내 살로 거푸집을 지을 뿐이네/내 뼈로 철근을 세울 뿐이네”(「황사바람」).
8년 만에 출간된 세번째 시집 『몽유 속을 걷다』에서 김신용은 그가 평생을 바쳐 지어온 집을 내보인다. 『개같은 날들의 기록』에 등기된 임시 집주소들, 부랑자 수용소에서 시장바닥, 그가 ‘자궁’이라 칭한 감옥에 이르는 수많은 집들은 이제는 구택(舊宅)이 되었다. 김신용은 드디어 자신 소유의 집을 갖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집은 누구나가 스쳐가는 ‘여관’이거나 아무도 살지 않는 ‘빈집’이다.
나의 生은 여관의 삶이었다
나는 수많은 여관을 거쳐 이 길 위에 서 있다
그러나 저 구름장 여관으로 가는 길은 모른다
내가 마지막으로 머물러야 할 저 여관,
그곳에서의 하룻밤으로 내가 無化되어야 할 곳!
―「구름莊 여관」 중에서
김신용은 자신의 생을 ‘여관의 삶’으로 요약한다. 떠도는 자는 집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 많은 것일 수도 있다. 지나쳐온 집들을 “수많은 여관”으로 지칭하며 김신용은 그 모든 집들이 집이 아니었으되 또한 집이었음을 생각하기에 이른다. 깊이 따져보면, 사실 모든 집은 삶이 잠시 머무르는 여관이 아니겠는가. 어떤 견고한 집도 절대적인 공간이 될 수는 없으며 기껏해야 장기 체류의 장소로 사용될 뿐이다. 집과 여관이 하나가 된 지점에서 김신용은 개체의 운명을 지닌 단독자로서 삶과 마주한다. 생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과 실존의 번민이 개입되면서 김신용의 시는 존재론적인 색채를 띠게 된다. 그렇다면 그가 “마지막으로 머물러야 할 저 여관” “그곳에서의 하룻밤으로 무화되어야 할” “구름장 여관”은 어디인가?
땅끝을 지나, 빈집에 들어서야/내가 빈집 속의 빈집이었음을
알겠네. 땅 끝에 매달려/저기, 수척한 바다처럼 누워 있는
―「빈집 속의 빈집」 중에서
그곳은 ‘빈집’ 혹은 ‘빈집 속의 빈집’이다. 희망찬 세상을 향한 함성이 그친 도시에 ‘살과 뼈’의 집을 지을 수 없었던 김신용은 이제 “땅끝을 지나, 빈집”에 든다. 아무도 없는 ‘빈집’에서 김신용이 발견하는 것은 고독한 자기자신이다. 그것은 또하나의 ‘빈집’이며, 어떠한 존재나 실체도 남아 있지 않은 ‘빈집 속의 빈집’이다. 그리하여 먼 남쪽 섬에까지 흘러든 그의 “기억회로에는 살아온 어떤 생의 무늬도 비쳐지지 않는”(「몽유 속을 걷다」)다. ‘빈집 속의 빈집’인 스스로의 몸이야말로 김신용이 마지막으로 머물러야 할 ‘구름장 여관’일 것이다. 지금 그는 “제 살 제가 먹고, 끝내 제 흔적마저 먹어버린다는 한고조(寒苦鳥)”(「부목일기 2」)가 되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혀 있다. “내 몸 다 줄 테니 누가 내 몸의 빈집을 지켜다오”(「빈집지기」)라는 그의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세상에 지친 자에게 텅 빔과 무화의 세계는 자기 소멸의 욕망에서 오는 아늑한 평온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는 알아요. 스스로 갇힌 이 감옥, 세상을 향한 집념, 인간을 위한 모든 욕망을 버렸을 때 다가오는 포근한 고절감, 또 이것이 얼마나 끔찍스런 감옥인가를. 그 안온함이 얼마나 가혹한 형벌이며 또 얼마나 뼈저린 자기 방기인가를. 저는 알아요. 자기 위안의 내 견고한 섬, 허망 위에 허망을 쌓아 물거품만 허벅지게 피웠다가 덧없이 스러지는 포말의 집이라는 것을.
―「흉터, 어느 작부로부터의 편지」 중에서
김신용은 ‘빈집’ 속의 자신을 반성적으로 대상화한다. ‘스스로 갇힌 감옥’이며 ‘자기 위안의 견고한 섬’인 ‘빈집’은 자기 방기 속에 ‘덧없이 스러지는 포말의 집’으로 인식된다. 이제 김신용에게 절박한 문제는 포근한 고절감과 안온함에 휩싸인 유약한 자신과 싸우는 일이다. 내면의 모랄을 지키기 위해 자신과 싸워야 하는 자아의 투쟁은 이 시대 새로운 저항의 양상이다. 김신용의 표현을 빌면, 90년대는 적이 곧 나인 ‘일인(一人) 전쟁’의 시대인 것이다. 빈집의 “감옥을 자궁으로 삼아,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우화(羽化)의 길”을 꿈꾸며 “몸은 조장(鳥葬)의 무덤처럼 황폐해져”(「一人 전쟁」)도 김신용은 자신과의 싸움을 멈추지 않는다. “폐허는, 나의 밥이었”(「개미밥」)노라고 말하는 시인의 빈집의 건축학은 치열한 자기 극복의 산물이라는 점에 깊은 의미를 지닌다.
‘빈집’의 대척점에 위치하는 공간이 있다. “하늘과 굴뚝/집과 아스팔트가 혼음을 하는 몽유도원”(「어두운 기억의 거리 2」)이 그것이다. 몽유의 도시는 김신용으로 하여금 “‘머리에 떨어진 벽돌’을 맞고 등에 닭털 날개가 돋아” 거리를 거니는, “반가사유상 같은 우주의 주민의 산책”(「몽유 속을 걷다」)을 꿈꾸게 한다. 이 희한한 공상은 추악한 욕망과 망상에 사로잡힌 자본주의 도시를 거의 무제한으로 희화화한다. 벽돌에 맞아 닭털 날개가 돋은 반가사유상의 산책은 몽유병자의 그것보다 훨씬 더 적나라하게 이 세계의 착란적인 증상을 포착한다. 이번 시집에 이르러 김신용은 그 동안 낱낱이 까발려온 현실에 대해 해학의 미적 거리를 형성해내고 있는 것이다.
산타야나의 말처럼, 경험한 것을 기억할 수 없는 자는 반복을 면할 수 없다. 김신용의 『몽유 속을 걷다』는 지난 시대를 분명히 기억하는 자의 오늘에 대한 성찰이다. 이 시집은 그 자신과 우리 모두가 과거의 무용한 ‘반복’을 피할 수 있도록 만들어줄 것이다. 단서 하나를 덧붙여두자면, 앞으로 김신용이 ‘몽유의 도시’와 ‘땅끝의 빈집’ 의 먼 거리를 잇는 길을 분명히 제시해줄 것이라는 점에 한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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