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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을 가르는 건 희망뿐이었다
1819년 8월12일 미국 뉴잉글랜드 남쪽 해안에서 38㎞ 떨어진 작은 섬 낸터컷. 선장 조지 폴라드가 이끄는 포경선 에식스호가 활강하듯 포구를 빠져 나갔다. 8월의 뜨거운 태양이 포경선의 낡고 기름에 절은 목재 위로 쏟아져 갑판 아래쪽 기온은 지옥같았다. 선원들은 향유고래 기름을 가득싣고 귀향하는 꿈으로 설렜다. 폴라드는 두달 전 결혼한 열아홉살 신부를 두고 떠나는 항해였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앞으로 이들에게 들이닥칠 엄청난 시련의 파고를.
11월20일 남미 에콰도르 해안에서 서쪽으로 적도를 따라 2800㎞ 떨어진 태평양. 에식스호는 거대한 향유고래에 받혀 침몰한다. 길이 80피트에 무게가 80t이나 나가는 거대한 놈이었다. 고래는 처음 공성 망치처럼 뭉툭하게 생긴 거대한 머리로 배를 들이받은 뒤 바닥을 스치고 지나가면서 배의 용골을 떨어져 나가게 했다. 이어 놈은 시속 6노트의 속도로 배를 향해 다시 돌진해왔다. 포경선은 뱃머리부터 가라앉기 시작했다. 고래가 첫 공격을 한 후 선원들이 에식호를 탈출하는 데는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세척의 배에 나눠탄 선원들은 남아메리카 서해안을 향해 필사적인 항해에 나선다.
급식량을 하루 건빵 85g으로 줄이고 다시 43g으로 줄였다. 뜨거운 태양과 폭풍이 끊이지 않는 바다 한가운데서 선원들은 굶주림과 갈증으로 서서히 죽어갔다. 표류 50일째 이등항해사 조이가 죽었다. 세 척의 배는 서로 헤어지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폭풍속에서 일등항해사 체이스의 보트가 사라졌다.
선원들이 하나 둘 죽고, 식량은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표류 60일째 흑인 토머스가 죽었을 때 선원들은 시체를 수장하는 대신, 양식으로 쓰기로 합의했다. 다음날 식량이 완전히 떨어졌을 때 생존자들은 그 「사악한 식사」에 참여한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표류 77일째. 생존자들은 죽은 동료의 시체로 연명했다. 『이제 우리는 마음속에 끔찍한 생각을 하며 서로를 바라보기 시작했다』고 한 생존자는 전했다. 얼마 간의 침묵이 흐른 후 누군가 입에 올리기 무서운 말을 꺼내고 말았다. 『제비를 뽑아 죽을 사람을 정하자.』
폴라드 일행은 표류 94일만에 칠레 연안을 지나가는 한 포경선에 의해 구조됐다. 구조당시 그들은 극심한 정신착란에 빠져 죽은 동료의 뼈를 움켜쥔 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훗날 멜빌의 소설 『백경』의 실제모델이 된 이 비극은 그동안 일부 생존자들의 구술기록으로 전해져 왔다. 그러나 1984년, 조난 당시 에식스호 사관실 담당 급사였던 토머스 니커슨의 새로운 기록이 160여 년만에 햇빛을 봄으로써, 누락되거나 왜곡되거나 숨겨졌던 부분들이 논란을 거쳐 보완되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일등 항해사와 사관실 급사의 각기 다른 기록을 세밀히 대조하는 것은 물론, 그 동안의 방대한 자료들을 수집 분석하고, 당시의 조선술, 항해술, 관측술, 고래의 생태학까지 섭렵하여 포경선 에식스호의 조난과 표류를 생생하게 재구성한 것이 나다니엘 필프릭의 바로 이 책, 『바다 한가운데서』(원제: In The Heart of The Sea)이다.
이 책은 우선 94일에 걸친 극한의 표류기로 읽힌다. 거대한 향유고래의 공격, 포경선의 침몰, 그리고 세 척의 작은 보트로 나누어 탄 20명의 항해는 그 상황에 처하지 않은 사람은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사태에 직면하게 된다. 폭풍과 파도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들이 싸워야 했던 것은 목마름과 허기와 공포였다. 7200 ㎞라는, 유례 없는 항로를 작은 배 한 척에 의지하여 떠돈다. 저자는 이들이 겪는 몸서리쳐지는 극한 상황을 잔인할 정도로 담담하게 혹은 냉정하게, 그러나 세세히 기록해 나간다.
이 책은 또한 인간에 대한 한 탐구의 기록으로도 읽힌다. 죽음에 직면하여 그 처참함이 극에 달한 순간에도 그들은 낸터컷 출신이냐 아니냐를 따져 보트에 분승시키고, 백인이 아닌 흑인이 죽었을 때에야 비로소 식량으로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낸다.(생존자들의 양식이 된 최초의 네 명이 모두 흑인이었다) 이들은 모두 어떻게든 낸터컷 퀘이커 교도거나 퀘이커 교도 집안 출신이었는데도 그랬다. 퀘이커 교도란 그 신앙의 내용이나 형식면에 있어 인디언과 흑인과의 우호를 표방하며, 그래서 흑인노예무역이나 노예제도를 강하게 반대하는 입장에 있었다.
이 책은 또 줄곧 쉽게 풀리지 않을 하나의 의문을 갖고 읽히게 된다. 어째서 그토록 험악한 얘기를 미국인들은 무슨 모험담이나 영웅담처럼 읽게 되었느냐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인기 있는 아동용 교과서로 윌리엄 H. 맥거피가 편찬한 『간추린 어린이 영어독본』에 실림으로써 미국 어린이들이 어떤 형태로든지 에식스호 이야기를 읽지 않고 자라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새롭게 정리된 이 책이 지난해 전 미국 도서상 논픽션 부문 최우수작으로 뽑혔으며, 타임지에 의해 2000년 최우수 논픽션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 책을 다 읽고 분명하게 느낄 수 있는 것 하나는, 현세와, 내세로서의 천국과 지옥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셋 모두가 하나의 형태로 뒤섞인 또 하나의 세계가, 바다라는 이름으로 우리들 곁에 엄숙히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 조선일보 책마을 01/6/16 구효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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